[BOOK 100] 체왕의 청구서

[BOOK 100] Oct 14. 2024 l M.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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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두 개의 달이 뜨는 문랜드의 마법사이자 가이드 체왕이다.

30년간 가이드 일을 해왔습니다.
여러분에게 문랜드가 낯설 듯,
저 또한 여러분의 세상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저 전해 들었을 뿐이니까요.
여기는 끝과 시작이 연결된, 아마도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일 겁니다.
우연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곳에서 만난 건 모두 인연, 카르마 때문입니다.
만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어 있으니까요.

_ moonland, 지은

6년 전 춘자를 만났다. 아니 불러내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문랜드에 미래도시를 건설해야 하는 데 누가 총수가 되겠냐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춘자는 당당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춘자는 전생에 호랑이였다. 이번 생 처음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그는 사람이 된 자신이 무척이나 신기했나 보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온통 ‘난’이다.

엄마는 뱃속에 나를 가졌을 때 호랑이 꿈을 꾸었다. 앞마당을 어슬렁거리던 호랑이가 창호문을 뚫고 들어와 엄마를 덮쳤다나. 호랑이 태몽을 꾸고 난 뒤, 엄마는 뱃속의 아이가 사내아이일 거라 확신했다고 한다. 꿈 이야기를 할 때 보여주는 엄마의 생생한 표정과 몸짓이 좋아서 종종 엄마에게 태몽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마치 처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는 손뼉을 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_ 크리스탈, 춘자

도사님도 인정한 좋은 팔자를 가지고 태어난 춘자는 일생을 손뼉을 치며 오두방정을 떨만한 흥미와 재미로 가득 찬 삶을 살았다고 했다. 그 삶은 총수가 된 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심자의 행운이었을 뿐.

“지혜 씨의 운은 이제 달라졌어요. 돈을 벌려면 지혜 씨가 만든 세계를 다른 이들에게 알려야 해요. 사기를 쳐서라도요.”

그 말에 귓속에서 삑 하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내내 싸우며 살아왔다고 여겨왔기 때문에 운 좋은 팔자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늘 반발심이 일었는데, 좋은 운 덕분에 너무 힘들지 않게 나를 지키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무기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운으로 살아남아 온 나의 좋은 시절에 안녕을 고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_ 크리스탈, 춘자

첫 인간 생, 그리고 그에 따르는 초심자의 행운. 이제 겨우 레이스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춘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나 보다.

기대를 넘어 확신하고 있었던 지원 사업의 결과 발표가 있던 날, 나는 카페에 앉아 휴대폰을 쥐고 연락을 기다리다가 다섯 시가 되자마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 동네 공원의 정자로 달려갔다. 이 지원 사업에 선정된다면 “사기를 쳐서라도” 나의 세계를 알리려는 시도가 성공한 것으로 여길 셈이었다. 그러나 “라다크에서 눈 표범을 만나기 위해 히말라야의 산과 호수를 탐험하겠다”는 나의 거짓말은 다른 진짜들 앞에 설 자리가 없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것으로 도사님의 말을 다시 확인한 셈이다. 좋은 시절은 끝났다. 운이 아닌 창과 방패를 장착해야 한다. 전사의 마음으로 전쟁터로 나서야 한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절망감이었으나 한참을 꺼이꺼이 울고 나니 해방감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나는 마침내 손에 쥐고 있던 빨간 약을 입에 넣었다. 눈을 질끈 감고 그걸 삼켰다. 벼랑 끝에서 뛰어내렸다.

_ 크리스탈, 춘자

빨간 약은 태어날 때 한 번 먹는 것이다. 인간이 될래? 호랑이로 살래? 쑥과 마늘로 만든 빨간 약을 호랑이가 먹은 것이다. 그리고 춘자로 환생했다. 그러니 춘자가 별이 떨어져 내리는 감찬의 들판 정자에서 집어삼킨 건 빨간 약이 아니라 멀미 약이다. 이제 드디어 시작되는 인생의 롤러코스터에 놀라 그간 열심히 집어 먹었던 꿈과 용기를 게워 내지 말라고. 아까우니까.

체왕 : 관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끝을 맺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 : 저는 지난 선택의 순간들에 시간이 멈춰버렸어요.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매번 후회하고 자책해요.
다시 그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요.
제 시계도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요?

나 : 현실과 꿈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만 하는 저 역시.

체왕 : 끝과 시작, 항상 그 경계에 머물러 있는 저 역시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여기 모인 분들 모두 경계에 머무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_ moonland, 지은

체왕의 숙소인 돌핀 호텔은 경계선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우주와 우주를 이어주는 포탈의 경계. 사람들은 경계에 머무른다. 아니 경계에서 태어났다. 인연과 카르마가 돌핀 호텔에서 이들을 만나게 하고 체왕은 기꺼이 가이드가 되어주겠다며 경계 밖 미래도시로 사람들을 초청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의 관계를 끝맺지 못한 채 경계선에 머무르고 만다. 그들은 모른다. 돌아갈 집 따위는 없다는 걸. 경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을 1차원 경계선 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체왕 : 커버린 아이는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_ moonland, 지은

베테랑 가이드인 체왕은 4륜구동 지프에 사람들을 싣고 험난한 문랜드의 계곡을 쾌속 주행하지만, 정숙한 운전에도 사람들은 달리는 차 위에서 뛰어내리곤 했다. 백미러 너머로 멀어지는 경계선에 공포를 집어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움인지 미련인지 알 수가 없다. 번번이 빈 차가 되어 허탈하게 돌아오는 체왕의 지프는 사람들이 자꾸 뛰어내려 원점으로 회귀하는 바람에 여기저기가 탈이 나기 시작했다. 할부로 끊어 장만한 차값은 관대한 후불제 덕에 미납인 채로 점점 빚으로 쌓이고, 무엇보다 초심자의 행운이 끝나가는 춘자의 초청객들은 역대급으로 지독하게 굴었다.

주변 사람들은 자꾸 엉뚱한 소리를 했다. 긴 시간 많은 것을 나누었다고 믿었던 이가 떠나갈 때는, 돌아오겠거니 여기면서도 무너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가까운 이들에게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꺼내지 않고 대충 묻어두었다. 묻어둔 마음에서는 이내 미움이 자라났다. 뿌리째 뽑아서 밟아버리고 싶었지만, 잊을 만하면 물을 주고 거름을 뿌려 자라난 미움을 기꺼이 가꾸는 것도 나였다.

_ 크리스탈, 춘자

로마에서 은퇴 준비 명령을 받아 든 체왕은 파리에서 춘자에게 어쩔 수 없이 청구서를 내밀었다. 후불제는 여기까지라고. 탈탈 털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지갑을 털어 보이며 어디 가서 사기라도 쳐 오라고 협박을 했다. 이제는 은퇴를 준비해야 하니까. 그런데 사기를 쳐 오라는 춘자는 엉뚱하게도 먹지 말라는 파란 약을 삼켜 버리고 말았다.

지독한 봄이었다. 지난가을 파리에서의 전시를 마치고 난 뒤, 나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었다. 그건 예정된 상황이었지만, 알고 있었음에도 대응과 해결은 다른 문제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우선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나의 믿음 앞에 운명은 자꾸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들이밀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파란 약을 삼켰다. 약속된 내용의 일을, 약속된 기간 동안 하고, 약속된 금액의 보상을 받는 일. 돈을 벌기 위해 내 믿음과 멀어진 대가로 두 달 내내 힘겨운 마음을 견뎌야 했다. 스미스 요원이 종종 나타나 그런 나를 비웃었고, 나는 그를 모른 척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_ 크리스탈, 춘자

결국 마법사는 돌핀 호텔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두루미를 쫓아 먼 산을 올라야 했다.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먼 산 너머 서편 밀밭에서는 파란 눈의 로리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떨어져 있어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물론 혼자가 아니었다. 신내림을 거부하고 있던 정은씨가 동행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던 정은이 아프기 시작한 건 일 년 전이었다. 물론 15년 차의 개발자로서 고질적 직업병인 거북목과 터널 증후군은 달고 살았지만, 병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오래 한 몸처럼 가지고 있던 미비한 증상이었다.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바로 잠들던 정은은 잠을 잘 자지 못했고 꿈도 많이 꿨다. 피가 낭자하는 공포 영화가 자는 내내 머릿속에서 상영되는 수준이었다. 밤마다 잠을 설치며 누적되는 피로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는 일이 잦아졌다. 늘 눈앞이 뿌옇거나 시렸고,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아팠다. 시간이 지나자 더는 오래 앉아 있을 수도 집중할 수도 없었던 정은은 일을 그만두었다. 아픈 이유를 찾으려고 여러 병원을 찾았지만 검사 결과에 아무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해서 들었다. 정은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어떤 것이든 숫자로 표현할 때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은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홍색 비단 한복을 입고 하늘 높이 그네를 타는 꿈을 꾸고 나서야 이것이 무병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였다. 꿈속의 방울 소리는 꿈을 꾸고 있지 않을 때도 정은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정은은 원치 않는 운명이 다가오는 걸 막고 싶었다. 절에 다니면 신의 기운을 누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라다크로 찾아왔다.

_ 눈표범을 찾는 여행, 젠젠

라다크의 정은씨와는 달리, 안타깝게도 먼 산의 동행 정은씨는 끝내 신을 거부하고는 체왕의 달리는 지프에서 뛰어내려 버렸다. 혼자 올라야 할 먼 산에 기어이 동행을 자처하더니 예의 여행객들처럼 멀어지는 경계선에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나동그라진 그는 다리가 부러졌다. 체왕은 이 반복되는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백미러로 바라보며 마침내 체념하고 말았다.세번째.png

상처받은 사람들은 늘 복을 두려워하며 경계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안이라도 그것이 안정적이지 않으면, 맹수로 돌변하여 공격하고 말 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하고, 적절한 제안을 이어 나간다면, 모두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결과를 획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용기’와 ‘정신적인 관대함’입니다.

사자를 다루려면 용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온정에 굶주린 사자라면, 관대한 소녀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부드러운 용기가 필요합니다.

_우주는 무어라 말하는가? @mmerlin

미래도시의 운명을 물을 때마다 우주는 언제나 이 타로카드를 내밀었다. 그때는 사자인줄 알았으나 저것은 눈표범이다. 놈을 다루려면 춘자와 그의 친구들은 컵을 깨야 한다. 그 안에 크리스탈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잔뜩 끌어모은 크리스탈의 무게는 체왕의 지프를 탈출하고픈 공포를 잠재워 준다. 파랗게 빛나는 크리스탈의 광채는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혀 준다.

그러나 그들에게 정말 무엇인가를 가져다줄 중요한 일에는 그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무엇이 되었거나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제 무엇이든지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고 받은 만큼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보통 반대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소한 것, 자신에게 완전히 소용없는 것에는 무엇이라도 대가를 지불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에는 절대로 지불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을 깨우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상당한 충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빠르게 잠들면 충격 하나로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오랫동안 지속적인 충격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충격을 관리할 누군가가 꼭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나기를 원하면 오랫동안 그를 계속하여 흔들어 줄 누군가를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사람이 자고 있다면 누구를 고용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을 깨워 줄 누군가를 고용하지만, 이 사람 역시 잠든다면 이러한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정말 깨어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을 깨우는 데 자기 시간을 쓰는 것을 거절할 것입니다. 왜나햐면 그는 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자신의 일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_ P.D. 우스펜스키 <구르지예프의 길> 중, 구르지예프의 말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체왕에게도 자신에게도. 그것은 옥합을 깨는 일이다. 그리고 체왕을 고용하고 눈표범을 고용해야 한다. 그들만이 문랜드의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관대한 체왕의 후불제는 끝이 나버렸다. 언제나 많은 대가를 요구하는 눈표범은 겨울이 아니면 좀처럼 만날 수가 없지만 체왕은 부르면 달려온다. 경계선을 넘을 용기를 보여준다면. 물론 가이드비는 이제 ‘선불’이다. 체념한 체왕은 선불이므로 뛰어내리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대신 그대는 크리스탈을 얻게 될 것이다.

내 꿈속의 호랑이는,
엄마 꿈속의 호랑이는,
내가 만나고 싶었던 눈표범은,
나였다.

나를 찾는 여행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늘 콧방귀를 뀌며 비웃곤 했는데 나는 그 여름, 돌핀 호텔에서 나를 만난 것이다. 내 안의 외롭고 용맹한 호랑이의 눈동자 위에 박힌 크리스탈을 발견했다. 지난 시간 삼켜 온 수많은 빨간 약들이 내 안에서 결정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_ 크리스탈, 춘자

 

P.S.

청구서가 지불되지 않았으므로, 체왕은 파리의 돌핀 호텔에서만 만날 수 있다. 모두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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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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