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협 보다 결별
Dec 11. 2023 l Thyateira (Akhisar)
사도들은 갈라섰다. 마가 요한이라는 제자를 2차 여행에 동행시키냐, 마냐의 문제로 심하게 다툰 것이다. 마가 요한은 1차 여행 때 중도에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성서에는 돌아가 버린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음으로 그가 왜 중도에 포기하고 집에 돌아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그의 중도 포기가 두 사도의 심한 다툼의 원인이었다는 점만 기록하고 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_ 사도행전 15장 37~39절

T랄 맞은 사도와 마음 약한 F사도가 심하게 다투었다니. F사도는 왜 T사도는 배려하지 않은 걸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야 정통 F가 아닐까? 잠깐 T랄 맞은 생각을 해본다.(미안하다 T발 마법사라. 마가 요한이 F사도의 조카였다는 사실은 안 비밀) 어쨌든 T사도는 동역자와 결별 한 채로 2번째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정 중에 무책임한 제자 대신 코냐 일대에서 칭찬받는 충성스런 ST 제자를 얻고 기뻐한다. 이제 팀이 완성되었으니 본격적인 여정 시작이다. 그런데 성령께서 전진하지 말고 건너뛰라 명하시니..
두아디라에서는 두 명의 여인을 기억해야 한다. 이세벨과 루디아. 기억하는가? 악의 재창조로 남편을 신으로 만든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 두아디라 이전에 이 도시의 옛 지명이 바로 ‘세미라미스’였단다. (BC 290년 셀레우코스 1세가 딸의 출생을 기념하여 딸의 이름을 따 ‘두아디라(Thyatira)’라고 이름을 바꾸었다고) 세미라미스, 아세라, 아스다롯, 이세벨 등 성서에 등장하는 유명한 악녀의 계보이다. 그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름이 이세벨인데 이세벨은 구약 성서에도 출현한다. 이스라엘의 일곱 번째 왕 아합을 맹신적 바알 숭배자로 만들었던 악처 이세벨. 악녀답게 이스라엘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다만, 선지자의 예언대로 창밖으로 내던져져 개들에게 시신이 뜯어먹히는 저주를 받는다. 그 이름 이세벨이 이 도시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두아디라는 염색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당시 부귀의 상징이던 자주색 염료가 이 지역의 특산물이었는데 이 염료는 두아디라 호수의 조개에서 나오는 투명하고 하얀 분비물을 원료로 한단다. 이 분비물은 일단 햇볕에 노출되면 진홍빛으로 변하는데, 한번 물들면 영구히 색이 변하지 않는 강한 염료였다고. 조개 한 마리의 입에서 한 방울의 물감만을 얻을 수 있으므로 매우 귀한 염료로 각광을 받았다는데, 당연히 이 지역에 염색업이 발달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배타적 길드 조합도 함께 발달했는데. 그런데 이 길드가 각각 트림나스라는 우상 신전과 배후에 연결되어 있었으니. 길드에 가입하려면 조합비를 빙자한 헌금을 신전에 바쳐야 하고, 정기적으로 신전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뿐만 아니라, 관행에 따라 신전 여사제와 음행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음.. 이것은 유혹인가? 시련인가?)

_ 두아디라의 유적은 도심 한 복판에 있어 발굴이 쉽지 않다고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국시로 하는 ‘유일신교’의 신도들에게 이것은 매우 큰 시험 거리였다. 자신의 생존 기반을 포기하면서까지 신앙을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내세를 포기하고 그냥 현세 복락을 선택해야 할까? 신도들은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난 이 여인은 자신을 스스로 선지자라 칭하며 사람들을 현혹했는데. “우상은 어차피 가짜 신인데 그걸 좀 섬기는 척한들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아, 복음이 뭡니까? 율법에서 자유를 얻게 해 준 것이 복음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불필요한 죄의식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 마음만 변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신도들을 미혹한 것이다. 심지어 교회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바치고 구제도 하고, 많은 일을 감당하려면 재물이 있어야 할 텐데, 여러분들이 길드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면 교회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며 궤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그 이름의 전통인가? 구약의 이세벨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했었다는데. ‘안식일에는 여호와를 섬기고 주중에는 바일 신을 섬기면 되지 않겠냐?’고. 뭐 그러면 되지 않겠는가? 안식일에는 쉬고 주중에는 돈 벌고.
그때 구약 이세벨의 천적 엘리야는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차든지 덥든지, 여호와든지 바알이든지, 신앙이든지 돈이든지 하란 말이다. 그리고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커밍아웃했다. ‘나는 돈을 믿습니다.’ 이 딜레마를 너무 현대로 끌고 오지는 말자. 나는 마법사지, 선지자가 아니니까. 내 입장도 묻지 말고. 다만 중요한 것은 ‘유일신교’의 교인들에게 타협을 외치는 선지자가 각광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게 이 교회가 책망받은 태도이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 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도다.
_ 요한계시록 2장 20절

살짝 비틀면 어떤 믿음도, 어떤 신념도 그럴듯하게 왜곡되는 것이다. 그리고 1도가 빗나간 것이 시간을 지나 거대한 이격을 만들어내고, 그때에는 내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차지도 덥지도 않게 되고 조용히 역사의 변방으로 사라지는 것이지. 천년을 묻혀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잘 먹고 잘살았음 됐고) 차든지 덥든지,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예언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두 사도는 그 극명한 차이로 서로 갈라섰다. T랄 맞은 T사도와 팔이 안으로 굽은 F사도 말이다. 타협이 아닌 결별은 세계를 확장시킨다. 성향의 차이일 뿐 신념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T사도와 F사도는 이후로도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관계를 잃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따지고 들면 이 도시는 ‘세미라미스’, 이방신의 땅이다. 지리적 요건이나 발달된 산업을 보아서도 이방신의 점령지인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 땅에 유일신교를 믿는 이들이 새롭게 교회를 개척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필라델피아의 형제들’처럼 삶의 선명성을 가지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 갔어야 한다. 우상숭배자들의 길드를 기웃거리지 말고. 악녀 이세벨은 그 갈등의 틈을 파고들어 타협점을 제시했다. 타협이라니? 성향의 차이에도 대립하는 마당에, ‘유일신교’의 근본을 흔드는, 극한 배타성의 종교의 신도들에게 타협이 웬 말인가? 희생 없는 타협은 변절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손해 보면서도 대의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타협이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신념을 왜곡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 따름이다. 당연히 공동체는 혼돈에 빠져 들었다.

혼돈에 빠져드는 것은 사회와 공동체가 아니라 마음이다. 순전하지 못한 마음은 쉽게 혼란해지는 것이다. 많은 입장들이 함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의 여지를 이미 가득 품고 있으니, 이 말을 들으면 이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저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순전한 마음은 언제나 갈 곳을 알고 있다. 그리고 혼돈의 자리에 그들은 없다. 운명이 이미 그들을 갈 곳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일대를 순례하던 T사도 팀은 두아디라가 속해있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편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선교를 펼칠 계획이었다. 그러나 성령은 이들의 행로를 막고 유럽으로 넘어가라고 명했다. 루디아가 기다리고 있는 마케도니아 땅으로 말이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_ 사도행전 16장 6~9절
루디아는 두아디라의 자주 옷감 장사로 신을 공경하는 신실한 여성이었다. 그러다 남편이 죽자 자기 고향을 떠나 유럽의 마케도니아에 있는 도시로 이동하여 업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령의 명을 따라 유럽 대륙으로 넘어온 T사도와 조우하게 된 것이다. 루디아는 그곳에서 복음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삶이 변화되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신실한 여인 루디아는 T사도 팀을 집으로 초청해 따뜻하게 영접했다. T사도 팀은 루디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서 이 도시의 교회를 시작하게 된다. 물론 루디아는 자신의 업인 염색술을 통해 얻은 자원으로 T사도의 든든한 연금술사가 되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_ 사도행전 16장 14~15절
고향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다른 신도들처럼 시험에 들었을지 모른다. 신실한 사람이라고 하였으니 타협하지는 않았더라도 길드의 압박을 견뎌내야 하는 시련을 견뎌내야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복 많은 여인은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았다. 본토, 친척, 남편의 집을 떠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다른 대륙, 다른 도시에서. 그리고 그곳에서 귀인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의 고향을 스킵하고 자신이 머무는 대륙으로 성령의 명을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루디아는 유럽의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사도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수 천 년 동안 신자들이 앙망하는 세례명이 되었다. (그녀가 부자였을 거라는 것도 안 비밀)

운명이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이끌려 할 때 우리는 자주 타협하고 싶어진다.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타협이 아니고 변절이고 변명이다. 신실한 이들은 언제나 운명의 이끌림을 기다리고, 느끼고, 그것에 반응한다. 그리고 감수한 희생은 놀라운 기적과 축복으로 되돌아온다. 낯선 도시, 낯선 세계를 통해. 운명은 자주 우리를 불러 깨우고 잠든 와중에도 꿈으로 메시지를 남긴다.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고. 그때에 현명한 사도라면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대륙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운 계획과 인간적인 갈등에 묶여서는 귀인을 만날 수도 귀한 만남을 경험할 수도 없다. 실날의 당김같이 세미한 직관의 메시지를 탁! 붙들 수 없다면 당신은 사도가 아니다. 마법사가 아니다. (누가 뭐래냐?) 인간적인 해석으로 타협하고 싶은 마음에 혼란스럽다면 당신은 이미 행음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의 메시지는 언제나 단호하고 타협이 없다. 우리는 따를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타협을 빙자한 변절은 파멸의 지름길이다. 신념이란 걸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루디아는 이름이 아니라 리디아 출신이라는 뜻이란다. ‘리디댁’인 셈. 그녀의 본명은 아마도 ‘순조로운 여행’, ‘멋진 여행’을 뜻하는 ‘유오디아(Euodia)’거나, ‘우연한 일’을 뜻하는 순두게(Syntyche, 신티케)였을 거란다. 그녀 덕분에 사도들은 유럽 여행의 시작을 순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집에서 유럽 최초의 교회가 시작되는 멋진 일도 우연히 생겨났다. 꿈을 따른 사도 덕분에, 용기 있게 낯선 도시로 업을 이어간 그녀 덕분에, 자신을 속이는 타협 대신 상처입은 결별을 선택한 사도와 혼란 속 비겁한 타협 대신 고향과의 분명한 결별을 선택한 그녀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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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