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 년 전의 개그콘서트
Dec 07. 2023 l Laodikeia

성스러운 도시(Hierapolis, Ἱεράπολις, Holy City)에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수킬로미터에 걸쳐 석관들이 대열을 이루고 서 있다. 네크로폴리스(νεκρόπολις, necropolis), 죽은 이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고대인들의 공동묘지이다. 묘를 외딴곳에 쓰는 우리 문화와 달리 많은 지역에서 죽은 자들은 산 자들과 함께한다. 여기 아나톨리아의 고대 도시들 역시 그렇다.
그냥 비석 하나 세워진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석관들이 줄을 지어 도열해 있는데, 그 통로를 지나노라면 영혼들의 사열을 받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기원전 2세기에 지어진 이 도시에 들어서면 고대인들이 얼마나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는지 새삼 되새기게 된다. 그러니까 묘역을 지나 연이어 등장하는 신전과 대성당, 교회와 제단들이 도시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크기도 어마무시하게. 느껴지는 부유함이 말도 못 한다. 마치 고대 강남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도시의 모습은 흡사 현대 신도시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화려한 분수와 장식이 넘치는 거대한 몰을 지나 펼쳐지는 각종 위락시설, 빠지지 않는 목욕시설은 이곳이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임을 상기시켜 준다. 그렇게들 씻었다며. 그러니까 최신식 워터파크와 향락시설을 완비한 휴양도시쯤 되겠다. 그런데 빠지지 않는 신심(信心)은 어디서 온 것일까? 부족할 것이 없어 보이는 부자 도시의 시민들이 말이다.

_ 고대도시 하면 빠지지 않는 야외 공연장, 1만 5천 관중을 수용했단다. 이런 게 도시 사방에 하나씩 꼭 있다.
영적인 관심을 갖는 이들은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유하거나, 보통 둘 중 하나이다. 중간 계층은 당장 눈앞의 하루하루를 치러내느라 영성靈性 을 가질 여유가 없다. 매일매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싼더미’니까. 그러나 너무 가난한 이들은 종교에라도 매달리게 되는 것이고, 너무 부유한 이들은 이생은 해결했으니 은근 다음 생이 걱정되는 것이다. 물질적 부와 신체의 건강은 재물로 해결하면 되는데 마음의 건강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그래서 종교, 영성은 아주 가난하거나 아주 부유한 동네에서 성행한다. 둘 다 기준은 얼마나 영험(靈驗)한가이다. 가난한 이들의 종교는 당장의 현실 문제 해결을 염원하는 ‘기복종교’이고, 부유한 이들의 종교는 뭔가 더 좋은 것이 있지 않을까를 해결해 주는, 비가시적 풍요, 새로운 차원의 너낌적 느낌을 강화시켜 줄 수 있는 핫한 ‘패션종교’이다.
2천 년, 패션종교로써 이 도시들에 새로운 유행을 불러온 건 ‘기독교’였다. 쌔끈한 유일신교. (그리스의 신들은 얼마나 많은가, 복잡스럽게시리) 그게 어떤 젊은이의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살아났다니, 이 얼마나 참신한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제멋대로인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해본 적 없는 죽음과 부활. 게다가 막강 제국과 정면으로 부딪쳐 거룩한 죽음으로 승리한, 심지어 신의 아들. 이 종교는 더 이상 가난한 이들의 종교가 아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수만 명을 먹일 때까지도 그냥 그랬다. 연탄 봉사, 도시락 배달이야 좀 옛날 트렌드니까. 가난 구제야 하자고 들면 황제도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런데 ‘혁명가’라지 않은가. 게다가 죽었어! 비저항의 아이콘, 그리고 부활해서 엿을 먹여?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듣도 보도 못한 핫한 스토리텔링이라니. 바람을 타고 산지사방으로 유행이 물밀듯 밀어닥쳤다. 우리가 예수보다 더 유명하다고 외친 비틀스가 역설해 주듯, 2천 년 전 지중해 소아시아 일대에 지저스 신드롬은 비티에스 저리가라였던 것이다.

그 열풍이 이 부자 동네 라오디게아에까지 밀어닥쳤다. 히에라폴리스 맞은편 동산에 자리한 이 도시가 얼마나 부자인고 하니, AD 60년 지진이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을 때 로마가 나서서 무너진 도시를 재건하도록 국가적으로 재정을 지원하겠다 했음에도 ‘우리 돈 많다’며 거절했다고. 라오디게아는 전통적인 교통 요충지로 지중해에서 시리아 내륙으로 이어지는 교역로 한복판에 자리해서 모직업과 상업, 은행업이 번창했다고 한다. 돈 좀 만졌겠네. 게다가 이 도시에는 유명한 의과대학이 있었는데 ‘프리기안’이라는 유명한 안약 생산지로 유명했다고. 그러니 앞 못 보는 이를 낫게 하는 정도로는 안 되는 거다. 피부병에 좋다는 파묵칼레 온천물도 흐르니 문둥병 낫게 하는 정도도 시큰둥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물질적으로 풍요한 이들이 제 발로 찾는 핫템은 무엇이어야 하나?
물질은 그득하니 빈 것은 마음이다. 빈 마음을 채워줄 영혼의 양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내세(來世)가 있다면. 내세에도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번 생은 성공했으니 말이야. 그런 이들이 ‘영성’을 찾는다. 패션종교, 유행영성에 손을 대고 탐닉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달콤하거든.
그런데 이 종교는 내세를 정면으로 내세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그게 허접할 대로 허접한 메시지가 되어버렸지만, 2천 년 전이다. 사람이 죽어 어디 가는지 아무도 모르는데, 천국에 간다니. 심지어 갔다 왔다니. 그런 곳이 있다니. 그렇다면 일단 전세권 하나는 받아놔야, 등기는 못해도 딱지는 확보를 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내세는 있을까? 있다면 어떤 곳일까? 나는 갈 수 있을까? 이제 막 궁금해진 이들에게 다신교 전통을 깨고 전에 없던 유일신을 내세우며 내세를 강조하는 이 종교는, 그것이 배타적이고 극단적일수록 유혹적인 것이다. 비트 일억, 스팀 만배처럼 말이다. 게다가 제자라며, 신도라며, 목숨 걸고 전하는 이들이 등장하니, 그러다 막 순교도 하니. 이러다 나만 천국 못 가는 거 아니야 하는 FOMO가 유행에 기름을 끼얹는 게지. 그런데 안 믿고 배겨?

_ 라오디게아 교회
그러느라고 교회를 참으로 거창하게도 세웠다. 게다가 히에라폴리스 꼭대기에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필립의 처형 터와 무덤이 있단다. 로마 황제에 의해 이 자리에서, 그의 스승처럼, 십자가형을 당했단다. 그 자리에 신자들이 순례를 오고 교회가 세워졌다. 병든 이들이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면 사제들이 그들의 몸에 안수하며 그들의 미래를 예언해 주었단다. 핫하다, 참으로 핫해. 치유와 예언, 혁명과 순교가 한데 어우러진 이 패션영성의 흐름에 참여하지 않을 부르주아가 어디 있겠는가? 그리하여 교회를 세웠다. 딱 요즘 신도시 종교 부지에 세워진 듯한 그럴듯한 교회를. 그래서 성서에서는 이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라고.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 3장 15~16절)

_ 라오디게아 교회의 차지도 덥지도 않았을 세례장
차지도 덥지도 않다. 여기 온천물이 그렇다. 히에라폴리스의 지하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온천수는 동쪽의 해발 2,800미터 높이의 산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만년설과 섞여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되어버린다.(덕분에 35~36도로 체온과 비슷해져 온천하기는 좋다. 뜨거운 거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비추지만) 그게 이 도시인들의 기본 정서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다만 유행은 핫할 것.

_ 미지근한 파묵칼레의 온천물
뭐가 문제겠는가. 이번 생 성공한 이들이 차지도 덥지도 않게 살아가는 건 당연하지. 이미 지킬 것이 많은데, 차다가 덥다가 하다간, 간신히 쌓아 올린 자산을 모두 무너뜨릴지 모르는데. 그렇게 차지도 덥지도 않게 영성과 신앙을 추구했다. 이들은. 그리고 신은 욥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시험한 것이다. 지진으로 말이다.

_ 교회는, 도시는, 지진으로 묻혀 버렸다. 1세기(60년)에도, 5세기(494년)에도. 그리고 7세기(610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도시는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후에는 채석장으로 사용되었다고.
마법사의 여정 중에도 지진이 일었다. 진도 5.2의 지진이. 밤에 건물이 흔들흔들하는 듯하고, 잠결에 지진이구나 생각이 들어도 깬 것도 잠든 것도 아닌 상태로는 그냥 무방비였다.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야 할지, 그냥 무시하고 더 자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천물처럼. 그러나 에너지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쏟아놓은 에너지가 전 지구를 강타했을 때, 그 생겨난 흐름에 올라타려면 누구든 제 십자가를 지고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란 말이지. 차지도 덥지도 않은 채로 요리조리 피한다고 생겨난 에너지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그 땅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외면한 흐름. 유행에 취해 편승하려고만 한 탓에 에너지가 계속 땅에 쌓이더니 마침내 물극필반(物極必反), 흔적도 남기지 않고 뒤집어엎어, 묻어 버린 것이 아닌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존재도 없던 사라진 도시. (라오디게아 고대도시 발굴은 2010년에나 시작되었다.)
너의 운명은 차다. 나의 소명은 뜨겁다. 그것들이 만나 폭풍을 일으키고 우리는 용솟음 치는 에너지의 파장과 함께 온 우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갈망과 연대, 결합과 일치 그리고 폭발하는 갈등과 파열하는 선택들. 디아스포라 되는 사명들이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들이 지하에 묻혀 조용히 썩어들어가는 동안.
부자 걱정,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 내 팔자나 고민해야지. 잘 살다 갔는데 무슨 기록까지 남기려고. 대대손손 차지도 덥지도 않았던, 유행이나 따르던 ‘패션 신도’로 반면교사의 교보재로나 쓰이면 되지. 이 신도시 교회는 현대에도 얼마나 많은 부르주아 사원의 강단에서 자신들 얘기하는 줄도 모르면서 ‘설교 예화’로 사용되는지. 코미디가 따로 없다. 히에라폴리스의 대극장에서나 공연될 ‘개그콘서트’의 단골 메뉴다.

차지도 덥지도 않다니,
마법사는 아직도 발굴이 한창인 라오디게아 고대도시의 휴게소 카페에 앉아,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는 줄지어 들어오는 성지순례객 버스들을 바라보며 기가 차다며 혀를 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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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