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도서관에서
[CITY 100] Jun 06. 2022 l M.멀린

“저.. 어느 학교 교복이에요?”
그저 어느 학교냐고, 그 교복은 어느 학교 교복이냐고. 지나가는 여고생에게 그걸 묻자고 가위바위보를 했어. 실은 수줍은 사춘기 남고생들이 여고생들에게 말이라도 한번 붙여 볼라고 설레는 가슴으로 술래를 뽑은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고즈넉한 정독도서관 앞뜰에서.
혜화동에서 안국동까지. 야간 학생들과 교실을 같이 쓰던 바람에 우리는 초등학생과 함께 하교를 하곤 했지. 긴 시간을 무엇을 할까? 공부를 하겠어? 핑계를 대고 도서관에, 이곳 정독도서관에 가는 거야. 저녁 도시락을 까먹거나 매점에서 우동이나 컵라면을 사 먹고는 앞뜰 벤치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장난을 치다가 마음이 동하면 가위바위보를 하는 거지. 헌팅도 아니고 고작 어느 학교 교복이냐고 물으려.
그게 다였어. 때로는 “00여고구요. 얘 이름은 000고, 쟤 이름은 000고 내 이름은 000이예요.” 묻지도 않은 친구들 이름까지 말해주고는 ‘그래서? 우리랑 같이 놀자고?’ 눈을 반짝이며 빤히 쳐다보는 여고생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수줍음이 치솟아 머리를 긁적이며 뒷걸음질을 쳤지. 그럴 거면서 왜 물은 거야? 바보 같은 고교생 시절.
아슬아슬하게 두발 자유화의 마지막 세대이면서 교복 착용도 피해 간 그런 학년이라, 까까머리도, 제복도 입어보지 못한 덕분에 교복들 사이의 사복만으로 어느 학교생인 것이 증명되던 시절. 그게 자유롭기도 부럽기도 하던 시절. 그 어느 해의 가을은 어찌나 사춘기 가을 앓이를 심하게 했는지 가슴에 커다란 멍 자국을 한 아름 안고는 여기 이 도서관 앞 뜰에 앉아 빨갛게 지는 해에 기대어 있었지. 저 해는 내일도 떠오를까? 지는 건 다시 오지 않는 건가. 불확실한 미래를 들이밀며 이 찬란한 시간을 교과서와 참고서에 우겨넣으려는 시스템에 소심하게 저항하는 우리에게, 여기, 이곳 정독도서관은 위대한 피난처이자 해방구였지. 비상구 앞에 서서 등 뒤로 숨겨주고 ‘애들 여기 없다고, 보지 못했다고.’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보장해 주는 진짜 어른의 등짝 같은.
종이 파일로 세운 칸막이 장벽 사이로 성문과 정석에 얼굴을 파묻고 쏟아낸 건 지식이 아니라 자다 흘린 침이었지만. 왜 그렇게 잠이 오는지, 왜 그렇게 졸음이 쏟아지는지, 앞뜰에만 나가면 말짱해지는 그 정신은 왜 그렇게 성문 앞에서는 혼미해지는지. 불안한 마음을 누르며 일탈이래 봐야 지나가는 여고생에게 어느 학교 교복인지 묻는 게 전부인 수줍은 청춘에게, 괜찮다. 영어단어 외우지 않아도 너는 전 세계를 지겹도록 쏘다닐거고, 미적분 따위 몰라도 돈이 돈을 벌고, 소수점 몇 단위까지 세어 가며 사고팔고를 반복하는 셈법은 익히지 말래도 저절로 익히게 된단다 말해주고파. 그러나 몇십 년이 지나도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벤치와 건물, 책걸상은 그대로인데. 너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늘고 마음이 늙어 이제 어느 학교 교복인지 물을 수도 없는 시절을 맞이하게 되는걸. 그때는 지나가는 여고생에게 말이라도 걸었다간 성추행으로 신고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해야 하는 시절에 살게 되는 거라고. 너의 순수한 마음은 받아줄 이도, 공간도, 마음도 하나 없는 세상에 살게 될 거라고. 그러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 오늘의 석양을 즐기라고. 이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불안해 말고 주저 말고 물으라고.
“저.. 어느 학교 교복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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