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사양 말고 석양

[MOVIE 100] Jun 19, 2020 l M.멀린

 

 

앞길을 가로막는 도덕을 뿌리칠 순 없습니까?

아아 나는 어찌 이제야 그대를 알았을까요? 사랑을 혁명이라 말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 혁명의 완성’이라 말하는 그대를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나는 확신하고 싶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맞습니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살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를 분리하여 생각하지만, 사랑 없는 혁명이 성공할 수 없고, 혁명 없는 사랑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진화시켜 온 두 개의 힘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완성시켜 주기에, 언제나 혁명은 사랑을 필요로 했고 사랑은 혁명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역동이 인류의 문명을 만들어 왔지요.

이 세상 속에 전쟁이란 것, 평화란 것, 무역이란 것, 조합이란 것, 정치라는 것이 있는 건 무엇 때문인지, 요즘 전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모르시겠죠? 그러니까 언제까지나 불행한 거예요. 그건 말이죠. 제가 가르쳐줄게요. 여자들이 좋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예요. 난 처음부터 당신의 인격이라든가, 책임감에 기댈 생각은 없었습니다. 나의 한결같았던 모험에 찬 사랑의 성취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완수했으므로, 이제 나의 가슴 속은 숲 속의 작은 옹달샘처럼 잔잔합니다.

나는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가 비록 남편의 자식이 아닌 아이를 낳았어도, 마리아에게 빛나는 긍지가 있다면, 그들은 성모자가 되는 겁니다. 내게는, 낡은 도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고 좋은 아이를 얻었다는 뿌듯함이 있습니다.

낡은 도덕. 이 시대는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낡은 도덕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과 혁명은 어느새 낡고 고루한 이상이 되었고, 사람들은 비겁함과 나약함을 숨기려 더더욱 낡은 도덕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만일 지금에라도 누군가 자신의 행복에 대하여 말하며 그대처럼,

지금 말씀하신 행복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건방진 말로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체호프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 아이를 낳아줘, 우리의 아이를, 하고 쓴 대목이 있지요. 니체의 에세이에도 내 아이를 낳아주었으면 하는 여자라는 말이 있고 말이에요. 전 아이를 낳고 싶어요. 행복이란 거, 그런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어요. 돈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아이를 키워갈 수 있을 만큼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자신의 꿈에 대하여 말하며 그대처럼,

저의 바람. 당신의 첩이 되어, 당신 아이의 어미가 되는 일.

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쏟아져 내릴지 모르는 조롱과 협박, 음해와 비난의 화살이 강물처럼 천지사방을 휩쓸어 버릴 겁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서 그대를 변호해 줄 수 없을 거예요. 불행하게도 우리는 모두 항구를 떠나지 못하는 낡은 배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런 편지를 비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자가 살아가려는 노력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여자의 생명을 조롱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항구에 꼼짝 않고 고여 있는, 숨 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는 숨을 쉴 수 없어,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닻을 올려 항구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머물러 있는 배는 예외 없이 더럽습니다. 저를 비웃는 사람들은 틀림없이 모두들 정박해 있는 배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저 떠 있는 배 말입니다.

그래요.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모두 더러워졌어요. 사랑과 혁명을 잊고 살아 온 세월만큼 우리 모두는 더러워졌어요. 그래서 자신의 더러움이 투사된, 누군가의 사랑과 혁명을 애써 폄훼하려 들고 애써 부정하려 듭니다. 혼자서는 모자라 모든 SNS를 동원하고, 심지어 국가에 청원까지 해가며 자신의 그림자를 외면하려 듭니다. 그리고 마녀사냥을 해대는 것입니다.

아아,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아아, 나는 어쩌려구 이런 세상에 내려왔을까요?

이 세상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세상과는 전혀 별개의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나 혼자 멀찍이 동떨어져, 불러봐도, 소리쳐봐도, 아무 메아리도 없는, 황혼의 가을 들녘에 초라하게 두 발로 서 있는 듯한, 지금까지 맛본 적 없는 처절한 고독에 휩싸인다. 이것이 그 ‘실연’이란 것일까. 들녘에 이렇게 홀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동안, 해가 완전히 져서 마침내는 밤 이슬에 얼어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생각하며, 메마른 통곡으로 어깨와 가슴이 부서질 듯 요동치고 숨조차 쉴 수 없다.

사랑해서 내려왔을 텐데, 분명 이 21세기를 그리워하며 돌아왔을 텐데, 이곳에서 나의 사랑은 간 곳을 잃고 비탄에 빠져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게 서글퍼 견딜 수가 없어. 외로움, 쓸쓸함, 그런 배부른 감정이 아니라, 그저 슬퍼. 칙칙해. 나를 둘러싼 사방의 벽에서 탄식 소리가 들려오는데, 나만의 행복 따위가 있을 리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인간은 어떤 기분이 들까. 노력. 그런 거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이가 될 뿐이야. 비참한 인간들이 너무 많아. 재수 없지?

비참한 인류, 탄식하는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요? 사랑과 혁명으로 세상을 일구어 온 인류가, 어쩌다 행복도 영광도 더이상 기대할 수 없는 탄식에 빠져든 것일까요? 나는 이 부분에 있어 그대의 동생 나오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절에나 나 같은, 이른바 생활력 없고 모자란 잡초는, 사상도 쓰레기도 없이 그저 스스로 소멸해가야만 할 운명인지 몰라. 하지만 내게도 할 말은 있어. 나도 내가 왜 여기서 비티기 힘든지, 뼈저리게 느끼는 바가 있어.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이건, 정말, 사상일까, 이 납득할 수 없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은 종교가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라고 생각해. 이건, 민중끼리의 술자리에서 뿜어나온 말이야. 구더기가 끓듯, 언제, 누구의 입에서 나왔다고 할 것도 없이, 뭉글뭉글,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나와, 온 세상을 뒤덮고, 서로를 낯설게 갈라놓은 거야.

이 불가사의한 말은 민주주의와도, 마르크스주의와도 전혀 관계없는 말이야. 그건 틀림없이, 술판에서 못난 놈이, 잘난 놈을 향해 내뱉은 말일 거야. 모두가 알고 있는, 초조함이야. 질투라구. 그 말엔 사상도 뭐도 없어.

하지만 그 술판에서 터져 나온 이 원망이 이상하게도 고매한 사상의 가면을 쓰고 민중 사이를 행진하고, 민주주의와도, 마르크스주의와도 아무 관계없는 말인데, 언젠가부터 그 정치사상, 경제사상과 맞물려 묘하게 비열한 것으로 전락하게 돼버린 거야. 메피스토라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사상과 바꿔치기하는 일 따위는, 양심에 찔려서 차마 못 했을지도 몰라.

인간은, 모두, 똑같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인가. 인간을 혐오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경멸하고, 일말의 자존도 없이 모든 노력을 포기해버린 말. 마르크스주의는, 일하는 자의 우위를 주장하지 똑같다고는 하지 않아. 민주주의는, 개인의 존중을 주장하지 똑같다고는 하지 않아. 그저 규타로(유곽의 호객꾼. 여기서는 속된 인간을 경시해서 칭한 말)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야.

“에에, 아무리 영악하다고 해도, 모두 똑같은 인간 아니야?”

왜 똑같다고 하는가,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는가, 노예 근성의 복수.

하지만 이 말은 사실 외설이고, 꺼림칙하고,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워하고, 모든 사상들이 유린되고, 모든 노력은 조롱당하고, 행복은 부정되고, 미모는 모욕당하고, 광영은 땅에 떨어지고, 이러한 ‘세기의 불안’은 납득할 수 없는 그 한마디에서 시작됐다고 난 생각해.

‘인간은 모두 똑같다.’ 말해버리면, 그렇게 믿어 버리면 우리의 배는 항구를 떠날 필요가 없어져요. 그리고 누군가 그대처럼 항구를 떠나려 하면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며 막아서고, 누군가 혁명이라도 일으키려고 하면 노예의 근성을 발휘하여 뒤로 숨어버리지요. 그래서 이 시대에는 누구도 사랑을 말하지 않고 누구도 혁명을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모두 항구에 묶여 더러워져 가는 노예가 되어 버린 거예요.

가즈코, 나의 가즈코, 그대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지요? 그대는 죽음으로 도피하지 않으려 아이를 낳은 거예요. 그것도 흠모하고 사랑하는 그이의 아이를, 그것은 도전이고 혁명이고 사랑이었죠? 그런 거죠? 그것이 굴레고 의무고 도피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대의 사랑을 혁명이라 칭송하고 싶어요. 우리 시대에 볼 수 없는 그대의 혁명에 대해서 나의 마츠코가 알았더라면 혐오스러운 일생을 살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사람들은 여인의 혁명에 대해 생각하며 ‘마르크스주의를 향해 외사랑을 했던 로자 룩셈부르크’를 떠올리겠지만, 당신은 그녀의 모습에서 ‘아무리 도덕에 위배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유부녀의 모습을’ 연상했지요.

나는 이 책을 읽고 색다른 대목에서 묘한 감흥을 받았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이 책의 저자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주 작은 일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상을 돌파해가는 돌파력이다. 아무리 도덕에 위배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달려가는 유부녀의 모습까지 연상케 한다. 파괴 사상. 파괴는 애달프고 슬픈,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다. 파괴하고, 다시 세우고, 완성하고자 하는 꿈. 그리고 한 번 파괴하면 영원히 완성하는 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그 절절한 사랑 때문에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파괴 없는 혁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파괴를 감수하는 사랑 없이 혁명은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혁명은 그 절절한 사랑 때문에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윤리를 따라 다시 세워지는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사랑을 외치는 이는 누구나 파괴를 감수하여야 할 것이며, 스스로를 혁명가라 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독립하겠다는 게 아니야. 난 말이야, 혁명가가 될 거야.’

그리고 그 파괴된 자리에 새로운 윤리를 수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 말입니다.

새로운 윤리, 아니 그런 표현도 위선이다. 사랑. 그래, 그것뿐이야. 로자 룩셈부르크가 새로운 경제학에 자신의 정열을 다 바쳐야만 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 사랑 그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예수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 세상의 종교가, 도덕가, 학자, 권위자들의 위선을 파헤치고, 신의 참사랑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파해 깨우치도록 하기 위해 그 열두 제자를 전 지역으로 파견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말씀은 나의 지금 상황과도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 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미움을 받을 것이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전투, 개시.

만약 내가 ‘사랑’ 때문에, 예수의 이 가르침을 단 한 구절도 빼놓지 않고 있는 그대로 지킬 것을 맹세한다면, 예수님은 날 꾸짖으실까. 어째서 ‘사랑’은 나쁘고 ‘박애’는 좋은 것인지 난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둘은 내게 있어 같은 것이다. 뭔지 모를 애정 때문에, 또 사랑 때문에, 그 슬픔 때문에, 몸과 영혼을 지옥에서 멸하는 자, 아아, 나는 나 자신이야말로, 바로 그런 사람이라 큰소리로 외치고 싶다.

그리하여 그대를 용기 있게 세상에 낳은 그대의 작가는, 72년 전 오늘, 스스로를 파괴하고 말았습니다.

이젠, 내가 죽더라도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할 사람도 없고, 아니, 난 알고 있어. 나를 여읜 당신들의 슬픔이 어느 정도일지. 아니, 아니, 보이기 위한 감상은 그만두자. 당신들은 내가 죽은 걸 알면 분명 눈물을 흘리겠지만, 내가, 살아 있다는 데서 받는 괴로움과 그리고 그 지겨운 삶에서 완전히 해방됐다는 데서 얻을 기쁨을 이해한다면 당신들의 눈물은 점차 거두어질 거라고 믿어.

그러나 그대는 역시 혁명가라, 그대의 작가의 죽음에도 조금도 미동하지 않을 겁니다.

신이 날 잊으셔도, 또 당신이 술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해도, 나는 내 혁명을 완성해 나가기 위해,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보잘것없는 인격에 대해 난 얼마 전에도 누군가로부터 여러 가지 들었습니다만, 내게 이런 강인함을 준 것은, 당신입니다. 내 가슴에 혁명의 무지개를 걸쳐 놓은 것은, 당신입니다. 살아야 할 목표를 준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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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또한 태어날 아이에게도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할 겁니다.

_ 사생아와 그 어미.

그래서 나 역시, 그대의 작가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충분히 생을 살아낸 혁명가의 죽음이었으니, 그대가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음으로써 사랑과 혁명을 완수했듯, 그대의 작가 역시, 그대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어놓음으로써 자신의 혁명을 완성했던 것일 테니까요.

나 역시 그렇게 낡은 도덕과의 전투를 선포하고 낳아놓은 아이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개새끼 소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것은 개와 소년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에는 낡은 도덕의 색안경과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식의 엉터리 시대정신으로 훼방할 수 없는, 개와 소년만의 독특한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대의 이야기를 접하고서는, 여기 ‘개새끼 소년’의 단짝 ‘개새끼 소녀’가 있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낳은 아이들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의 이야기는 <사양(斜陽:지는 햇빛, 왕성하지 못하고 차츰 쇠퇴하여 가는 일)>말고 <석양(夕陽:夕 저녁 석, 한 움큼 사)>이어야 할 것입니다. 저무는, 사라지는 태양이 아닌, 한 움큼 가득 움켜쥔, 내일의 태양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생의 사랑과 혁명을 거머쥔 <사양夕陽>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대의 이야기에서 어떠한 것도 얻지 못할지 모릅니다. 오히려 시대 뒤떨어진 낡은 관념이라 욕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입니까! 사랑의 혁명가가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시다. 비록 우리가 그대가 얘기한 ‘희생자, 도덕적 과도기의 희생자’에 해당하더라도, 혁명가는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술을 끊고, 병을 치료하고, 건강하게 살며 멋진 작업 활동을… 어쩌고 하는, 돌아서면 꺼져버릴 그런’ 응원 따위에 속기보다, ”멋진 작품 활동’보다, 한 목숨 포기했다는 심정으로 악덕한 생활을 끝까지 해나가는 쪽’을 과감히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맞서 싸운 1회전에 동참하고, 그대의 정신에 합류하여 남은 2회전, 3회전 역시 당당하게 싸워 승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치른 1회전에서는 낡은 도덕을, 대단하진 않더라도, 약간은 물리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음엔, 태어날 아이와 함께 2회전, 3회전을 힘껏 맞서 치를 각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이 내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대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서서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의 심판대에 끌려나간다 해도, 양심의 가책 따윈 조금도 느끼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랑과 혁명을 위해 태어난 존재, 신도 우리를 벌할 리 없습니다. 우리는 전혀 잘못을 범하는 게 아닙니다.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당당하게, 내 두 눈으로 그 사랑을 볼 때까지 이틀 밤, 사흘 밤을 밖에서 지새운다 해도 우린 물러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아무쪼록 당신도, 당신의 전투를 끝까지 해나가세요. 혁명은 아직,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귀한 희생이 필요할 듯 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쓰고 나면 더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맨 뒤로 밀어 둔 그 말을 하려고 합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사랑’이라 썼더니, 그 뒤엔, 아무 말도 쓸 수 없게 됐다.’)

From. 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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