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종말-2부] 그 여자 그 남자의 사정

2009.11.09 

 

여자_ 당신 미쳤구나. 이혼이라도 하자는 거야. 이따위 글을 쓰는 이유가 뭐야. 딴 여자라도 생긴 거야? 그렇구나 솔직히 말해. 그렇게 돌려서 변명하지 말고!

여자는 머리 끝까지 화가 났다. 어느 날 느닷없이 잘 나가던 직장을 때려치우고는 인생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남자가 처음에는 불쌍했다. ‘그래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겠어’ 여자는 불필요한 위로가 남자에게 더 스트레스가 될까 싶어, 눈치를 보며 편안하게 해주려 노력했다. 어렵게 시작한 결혼생활이라 여유도 없고, 한두 달만 수입에 차질이 생겨도 빚이 늘어날 만큼 빠듯한 살림이었기에, 남편의 사직은 바로 생계를 위협하는 어려움이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남자_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 거야. 아니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도 대부분 알지 못하고 있지. 나는 어린 시절에 대통령은 전두환 밖에 없는 줄 알았어. 왕처럼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어느 날 대통령 선거를 한다는 거야. ‘뭐야 대통령이 바뀔 수도 있는 거였어?’ 충격이었지. 당신이 믿고 있는 또 지금도 속해있는 가족제도도 마찬가지야.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믿고 있지만 실은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는 중세 사람들의 생각이나 다를 바 없는 무지로부터 비롯된 맹신일 수 있다구.

여자는 남자가 방구석에 처박혀 책만 보더니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여자_ 그래서 그럼 당신은 가족제도가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거야?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당신 꺼라도 된다는 말이야? 왜 아프리카나 중동으로 이민이라도 가시지. 열 여자 거느리며 떵떵거리고 살아봐. 어디..

여자는 이미 화와 흥분상태를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이에 전혀 동요되지 않고 있다. 오랜 시간 심사숙고 해왔다는 듯 남자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남자_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시작된 가족제도는 꽤 오랜 세월 나름의 균형을 가지며 이어져 왔어. 덕분에 남자들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고, 야곱의 팥죽을 배고프다고 넙죽 받아먹고 장자의 권한을 팔아먹은 ‘에서’처럼, 여자들은 남성의 가부장적 권력 아래 점점 자신의 재능과 힘을 퇴화시켜 간 거야.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 남자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쟁취하고, 세상을 피로 물들여 갔지. 안정된 경제적 지원에 만족하게 된 여자들은 사육된 들개처럼 혼자서 자립할 힘을 잃어갔고 종국에는 남자들의 재산의 일부처럼 팔려가거나 거래 되었어.  

여자_ 그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야.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직장에서, 사회에서 여자를 사람 취급하지 않는지 알아? 난 여태까지 치근덕대고, 찝쩍대고, 여자를 하녀 취급하는 남자들 속에서 지겹도록 일해왔어. 그게 싫어서 결혼 했건만 그래서 이젠 탈출이다 생각했는데, 당신은 회사를 때려쳤지. 둘째는 이제 젖을 겨우 뗐는데 나보고 다시 그 지긋지긋한 회사를 다시 나가라고? 아니 받아주기나 하면 다행이지.. 결혼한 아줌마가 할 일이라곤 마트에서 캐셔나 보는 게 다라고.. 알기나 해 당신이 저지른 짓이 나한테 얼마나 큰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오는지?

여자는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다. 비록 불타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번듯한 직장에 나름 준수한 외모를 지닌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을 때, 이제 고생은 끝이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남자_ 알아. 나도 알고 나도 힘들어. 당신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이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유전자를 타고 유전되어온, 잘못된 사회의 관습에 대해서 말하는 거야. 당신도 나도 다 피해자일 뿐이야. 아니 모든 인류가 피해자지. 누구도 이렇게 가족제도가 모두에게 불행한 감옥으로 변모하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나도 그저 성실하게 일하고, 집 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시집, 장가보내고 은퇴해서 노년을 즐겁게 보내면 되는 줄 알았어. 아니 그럴 수만 있다면 너무 행복한 거지. 그건 그저 환상에 불과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거야. 없는 걸 있다고 뻥치고 기대하게 만들고, 평생 기대만 하다 죽어가게 만든 속임수이라고.

잠시 여자와 남자는 아무 말도 없었다. 여자는 남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런 것에 대해 서로 얘기하고 생각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입을 통해 다시 그런 생각들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이 짜증 날 뿐이었다.

여자는 불타는 사랑을 나누었던 옛 애인이 떠올랐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 옛 남자는 시간이 흘러도 여자에게 청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그런 그가 답답했고 둘 사이에는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참다못한 여자는 옛 남자에게 나랑 결혼할 생각이 없으면 그만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러자 옛 남자는 결혼은 구속일 뿐이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버렸다. 여자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 한 뒤로 그를 잊고 있었다. 아니 결혼의 계약조건을 성실히 지키고 싶은 여자는 그를 떠올리는 것은 지금의 남편에 대한 죄라고 여겨 기억조차, 추억조차 꼭꼭 숨기고 살아왔다. 그리고 남자에게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자신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늘 다짐하며 살아왔다. 결혼생활의 위기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여자는 스스로 잘 감당해내고 있다고, 이런 고생 후에는 반드시 행복한 날이 올 거라고 위로하며 버텨왔다. 그런데 남자는 지금 그걸 한순간에 무너뜨릴 기세로 아무렇게나 살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는 감정이 복잡해졌다. 어떻게 지켜온 결혼생활인데.. 섭섭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이 순간 옛 남자가 떠오른 사실에 당황했다. 게다가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두려웠다. 심지어는 다른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이 죄스럽기까지 했다. ‘뭐야 이 마음은.. 화가 그렇게 났는데,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다니..’여자는 이런 마음을 숨기려는 듯 당당한 척 말을 내뱉는다.

여자_ 당신 그냥 내가 싫증 났다고 말해. 상관없어. 괜찮아.. 나도 얘들 데리고 잘 살 수 있어. 힘들고 지겹지만 남들 다 그러고 사는데 뭐. 나도 혼자 살 수 있다고. 너만 능력 있는 줄 아니? 나도 직장에서 인정받는 베테랑이었다고. 그래 맘대로 해. 이혼하든지, 혼자 나가 살든지. 흑..

여자는 말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왈칵 눈물이 쏟아냈다. ‘이렇게 내 결혼생활은 끝나는 건가? 어떻게 지켜왔는데..’ 서러운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면서도 생존본능에 투철한 여자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위자료는? 집 보증금은 어떻게 나누지? 어른들, 친척들에게는 뭐라 말하지?’ 순식간에 많은 염려와 불안들이 러시를 이루며 여자의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남자_ 헤어지자는 얘기가 아니야. 나는 아직 그럴 용기도 힘도 없어.

‘아직.. 그럼 언젠가는 그렇게 하겠다는 얘긴가. 이런 이 사람은 이미 마음을 정했구나.’ 여자는 남자의 건조한 대답에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_ 세상은 온통 남성들의 지배하에 있었어. 알다시피 여자는 선거권도 없었고 재산의 일부처럼 취급 당했어. 그러다 혁명이 일어난 거야. 산업혁명과 기술문명의 시작, 대량생산 시스템은 더 이상 사람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를 연 거야. 물론 산업혁명 이후 한동안은 여전히 여자와 아이들은 그저 작업장을 농장에서 공장으로 옮겨온 듯했어. 그래서 직공으로, 공장노동자로, 여전히 남성의 지배하에 있었지. 그러나 계속되는 기술의 발전은 노동력의 감소로 이어졌어. 덩달아 이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아이들을 많이 낳아야 할 이유도 없어졌지. 영주든, 자영농이든, 소작농이든, 농업을 기반으로 한 사회와는 달리 산업사회는 기술만 있으면 누구든 돈을 벌 수 있게 된 거야. 더 이상 소작농도 자영농도 힘들게 몸을 움직여서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어진 거지. 자본가들이 등장하고 풍요의 시대를 거치며 빈익빈, 부익부는 점점 간격이 커져갔어. 몸뚱아리만 가지고도 먹고 살 수 있었던 이전의 사회와는 달리, 고도로 발달해 가는 산업사회는 기술을 요구하고,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로 변모해 갔어. 물론 이 기회를 이용해 천한 소작농에서 대박을 친 기술자, 사업가들도 등장하곤 했지만 자본의 지배는 순식간에 사회를 고착시켜 버렸지. 이제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아이 하나 제대로 키우기 힘든 시대를 만나게 된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력이 필요 없어진 사회에서 자식은 애물단지에 불과하게 된 거지. 그래서 어떻게 되었겠어? 산업과 기술이 발달한 사회일수록 인구가 감소했겠지. 아이 하나 먹여 키우기도 어려운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야. 이전에야 농사를 지었으니 적어도 자고,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없는 자는 바로 굶주림에 내몰려야 하게 된 거야.

여자_ 그래. 그래서 내가 둘째 안 낳겠다고 한 거야. 잘 아는 사람이 왜 실수하고 그래. 술 먹고 덤비지 말라니까.

남자_ 그래 나도 솔직히 임신했다는 얘기 듣고 겁이 덜컥 나더라. 8남매, 10남매씩 낳던 예전 같으면 일상 같았을 일이 이제 공포가 된 거야. 문명은 발달하고 편리해졌지만, 여전히 아니 예전보다 더 사람들은 생존의 문제에 내몰리고 있어. 나는 그 모든 공포와 두려움이 가족제도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해야 할 가족이 내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거야.

여자_ 그건 지나친 비약이야.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건 무능한 당신의 변명이라고!

남자_ 행복하다고? 당신이 늘 부러워하던 그 치과의사 부부가 진짜 행복할까? 그 아이들까지도 말이야. 해외를 제 집 드나들듯 다니고 외제차 타고 다닌다고 행복할까? 내가 보기에 그건 그저 자위에 불과해. 그 부부가 정말 치과의사가 꿈이었고 사명감과 보람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걸까? 물론 그렇다면 다행이지. 하지만 원래 화가가, 소설가가 꿈이었는데 그러고 있다면 행복할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냄새 나는 남의 입 들여다보고 있는 그 직업이 그렇게 행복할까? 돈 많이 버니 쇼핑하고 여행 다니고 다른 걸로 위안 삼는다 쳐. 아이들은? 도우미 아줌마랑 하루 종일 지내고, 저녁에나 잠깐 보는 엄마 얼굴은 피곤과 스트레스에 절어있고, 따뜻한 대화 한마디 나눌 시간 없는 부모자식 간이 어떻겠어? 그래, 그래도 그 부부는 돈이나 많이 벌지. 그저 쥐꼬리만한 월급에 목매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삶이 현대인 대부분의 삶이야.

여자_ 돈이나 많이 벌어다 주면서 그런 얘기해.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집 한 칸도 없으면서..

남자_ 잘 들어. 이게 현대사회에 새롭게 등장한 노예제도야. 자본과 인프라는 산업시대에 들어서며 운 좋게 초반 선점한 인구의 5%가 독점하고 있고, 이들은 이 시스템을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있어.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맞는 말이야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지. 그런데 그 능력을 어떻게 갖추냔 말이야. 태어날 때부터 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냐고. 아! 물론 재벌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수십억 재산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하지. 시스템이 제공하는 기회는 피라미드 같아서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최후의 몇 명만 쟁취할 수 있어. 그것도 기존의 자본권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말이야. 그들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는 거야. 인생 낙오자로 스스로를 낙인찍으며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거란 말이야.

여자_ 당신 좌파야? 빨갱이야? 이런 얘기는 당신한테서 처음 들어봐. 누구나 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거야. 그런 비굴한 얘기는 낙오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구

남자_ 당신 말이 맞아. 누구나 간절한 소망과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성공하고 꿈을 이룰 수 있어. 그런데 왜 당신은 그렇게 못해? 왜 아이들 때문에, 집 사는데 그 꿈을 저당 잡아 놓고 있는 거냐고? 그거야말로 진짜 나약한 핑계야.

여자_ 내 꿈은 그냥 소박하게 살면서 공과금 같은 거 안 밀리고 내 집에서 남편,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거란 말이야.

남자_ 소박 그게 소박한 꿈이니? 그런걸 문명에 세뇌 당하고 있다고 하는 거야. 현대사회에서 내 집에서 공과금 밀리지 않고 노후 걱정 안 하면서 사는 게 쉬운 일이야? 그거야말로 원대한 꿈이야!

어느새 여자는 남자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목이 타는 듯 앞에 놓인 맥주 캔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말을 이어나갔다.

남자_ 세상은 누가 제한된 자원을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정해졌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땅이야. 인류의 역사는 땅을 빼앗고 지켜내기 위한 전쟁의 역사였으니까. 현대에는 특히, 이 나라에서는 그것이 집이야. 도시에 집중된 인구는 당연히 주택 부족을 일으키고 제한된 땅에 주택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어. 여기까지는 인구의 집중과 이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야. 문제는 자본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장난을 치고 사람들을 착취한다는 거야. 투기를 조장해서 집값을 올려놓고 능력 위주로 사원을 선발하는 게 아니라 연고와 학벌 위주로 사원을 선발하는 거야. 자연히 교육시스템이 좋은 곳은 집값이 계속 상승할 테고 덩달아 주변 지역들도 주택시장이 요동을 치지. 하루에도 몇 배씩 뛰는 집값은 이미 평범한 서민들로서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범위 이상으로 담보대출을 해주고는 20년, 30년씩 이자를 갚게 하지, 적어도 그 기간 동안은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둘 수 없게 되는 거야. 자연히 임금보다 고용안정이 중요한 서민들은 싼 임금에도 대출이자를 갚기 위해 직장을 떠나지 못해. 그것도 어디까지나 자본가들이 필요로 하는 인력들만 그래. 그렇게라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차라리 낫지. 결혼할 때 변변한 전세금조차 없이 시작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웬만큼 벌어선 전세금조차 마련할 수 가 없어. 결혼 초에 한번 벌어진 격차를 무슨 수로도 만회할 수가 없는 거야. 월세니 이자니 가계지출이 많은 상황에서 애들 교육에 얼마나 투자할 수가 있겠어. 이렇게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시스템을 계속 유지해 갈 수 있는 거야. 그나마도 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어려운 삶을 겨우겨우 유지해 가고 있어.  

여자_ 그래 알아 악순환이지. 그런데 그렇게라도 안 살면 어떻게 살아? 그럼 죽어?

남자_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꿈을 발견하게 되면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10년 정도 노력하게 되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어. 10,000시간 몰입의 법칙, 10년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신비야. 생각해봐.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가지 일을 10년 동안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게다가 그 일이 자기가 좋아하고 원하는 일이라면 10년의 세월은 그를 숙련자, 달인으로 만들어 놓게 되어 있어. 아니 그런 걸 떠나서 대부분의 업종에서 한 가지 일을 10년씩 한 사람은 드물어. 같이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 10년 뒤에도 여전히 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 없다는 얘기야. 능력에 상관없이 그는 역사를 가진 전문가의 위치에 오를 수 있어. 물론 그냥 건성건성 허송세월 했다면 별 볼 일 없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그런데 직장에서 목매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래서 개인의 비전과 연결시켜 노력한 시간이 아닌 그저 승진하고 월급이나 받아먹으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이라면 말야. 10년쯤 뒤에는 명예퇴직을 슬슬 생각해야 되는 시간에 직면한다는 얘기야. 10년 동안 살아남기도 쉽지 않지만 말야. 다시 말해서 구두를 닦더라도 10년 정도를 하면 단골도 생기고, 업계 돌아가는 상황도 꿰게 되고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이야. 물론 행복의 조건은 그 일이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이어야 하지. 시스템의 권력자들은 이걸 두려워하는 거야. 사람들이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는 일. 그리고 제 힘으로 그것을 도전하려고 마음 먹는 일. 그러면 자신의 기반들이 위축을 받게 되거든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를 사람들 속에 심어주는 거야. 매스컴을 이용하고 매체와 문화를 이용해서 너는 타이거 우즈도, 빌 게이츠 같은 천재도 아니니 잘못하면 굶어 죽게 될 거라고 말이야. 그 사람들은 태생이 다른 거라고 믿게 만들지. 다만 그저 사람은 평생 집이나 한 칸 마련해서 딸린 식구들이랑 먹을거리 걱정 안 하며 살면 된다고 말이야.

여자_ 그렇게 잘 아는 당신은 왜 그렇게 못했어?

남자_ 당신이랑 똑같아. 나도 남들처럼 대학 나오고 회사 들어가면 부자는 아니어도 무난하게 살게 될 줄 알았어. 물론 학창시절에는 하고 싶었던 일, 꿈이 나름 있었지만 대학입시, 취직 준비를 하면서 그런 건 까맣게 잊게 되었어. 마치 이런 거야. 유명한 국수집 골목을 처음 갔는데 입구에서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거야. 줄 선 사람에게 이 줄이 무슨 줄이냐고 물어보니 자기도 모른대 자기는 단지 유명한 국수 원조 집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줄이 길게 서 있길래 이 집인가 보다 하고 서 있는 거래. 그래서 나도 그 뒤에 따라선 거야. 근대 가도 가도 줄이 안 줄어드는 거야. 가끔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나오던 누군가 “여러분 여기 줄 서봐야 이 집 음식 맛 별로예요.” 얘기하고 가기도 했지만 잘 먹고 깽판 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까지 줄 선 시간도 아깝고 그래서 계속 줄을 못 떠나고 있는 거야. 그런데 아주 나중에 알게 된 거지. 줄이 모퉁이를 돌아 가게 앞에 다다를 때쯤 진짜 원조 집은 골목 안쪽 광장만한 크기로 자리하고 있고, 거기는 기다릴 필요도 없이 맛있는 음식을 바로 먹을 수 있다는걸. 그런데도 그걸 보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을 떠나질 못해. 왜냐고? 남들이 다 서있는데 안 있으면 불안하고 혼자 나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거야.

여자_ 그게 무슨 용기가 필요해, 바보 같은 거지. 나 같으면 지금 당장 달려가겠다.

남자_ 과연 그럴까? 당신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걸. 내 얘기를 들어봐.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달려가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 때문이야. 권력을 잃어버린 불쌍한 남자들은 대부분 직장생활 몇 년 만에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깨닫게 돼. 그리고 그제서야 내 꿈은 무엇이었던가 떠올리게 되는 거야.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기에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결론에 이르러. 먹여 살려야 할 가족들이 있거든..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마누라, 새끼들.. 홀 몸이라면 다 때려치우고 훌쩍 여행이라도 떠나겠지만 대부분의 가장들이 그렇게 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다니는 거지. 쌓인 스트레스는 어떻게 하겠어. 술로 담배로 푸는 거야.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아? 좋은 남편도, 좋은 아빠도 에너지가 충분하고 살만해야 할 수 있는 거야. 그러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랑 놀아 주지 않는다고, 집안일도 하나도 안 도와준다고, 이번 달 카드 값은 어떻게 할 거냐고 쏟아지는 잔소리를 감당해야 해. 그러니 자꾸 밖으로 돌고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거야. 요즘은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이 가장 안락한 남자들의 휴식장소처럼 되어버렸어. 용기 있게 뛰쳐나간 홀몸들이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겠어. 이미 좋은 시간 다 보내버렸는데 뭘 해도 남들보다 5년, 10년은 늦었는걸. 결혼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자신의 꿈에 도전할 자원도 용기도 다 잃은 채 허송세월하는 거야.

여자_ 너무 남자들 입장만 얘기하는 거 아냐? 밥하고 빨래하고 애들 뒷치닥거리 하는 건 쉬운 일인 줄 알아? 게다가 맞벌이하는 워킹맘들은 가사와 직장일 모두 병행해야 한다고.. 그 스트레스는 또 어떻겠어.

남자_ 그래서 하는 말이야. 가족제도의 본질이 바로 이거란 말이야. 생존을 위한 경제적 계약관계로 시작된 제도가 이제 그 본질인 경제적 안전망에 위협이 되니까 붕괴하고 있다고. 시작은 점잖아. 출산율이 줄거나 독신 인구가 많아지는 거지. 결혼연령이 늦어지고 그럼 그 과도기에 이미 결혼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 주변에 봐서 알잖아. 줄줄이 갈라서고 있어. 이혼한 이유의 십중팔구는 경제적 문제 때문 이야. 성격차이, 가정불화 줄줄이 있어도 너무 못 벌어서, 또는 너무 잘 벌어서 생긴 문제들이라고. 당신 친구들 중에 이혼 안 하고 아직도 결혼생활 유지하는 친구가 얼마나 돼?

여자_ 음.. 한 30%?

남자_ 그래 내 친구들 중 20대 때 멋모르고 결혼한 놈들 빼고는 여직 다들 노총각 신세를 못 면하고 있어. 국제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놈들 결혼하기 쉽지 않을 거야. 그렇게 떼밀려 하는 결혼이 행복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산업혁명을 거쳐 정보화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 더 이상 남녀의 구분은 무의미해졌어. 물론 여전히 정치나 보수적 권력 분야는 남자들이 쥐고 있지만 머지않아 여성들이 사회 모든 부문의 리더십으로 등장하게 될 거라고 기존 부권 중심의 가족제도는 무너지고 모권 중심의 사회로 회귀하는 거지. 남자들 다시 말해서 능력 없는, 경쟁력 없는 남자들은 결혼조차 하지 못하게 돼. 능력 있는 여자들은 아이를 얻기 위해서 결혼하거나 당당하게 혼자 살아가게 될 거야. 결혼생활도 어디까지나 남자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면 체면상 데리고 살거나, 생활에 위기가 닥치면 당장 쫓겨날 수밖에 없는 신세로 전락해 갈지도 몰라. 이것이 지금의 가족제도가 처한 위기야.

여자는 남자의 말에 점점 수긍하기 시작했다. 골방 생활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생각이라며 쓴 장편의 글에 이 남자가 이혼할 작정이라도 한 건가 싶어 공포와 불안에 휩싸여 따지듯 시작한 대화가 어느새 자신의 결혼생활과 삶의 전반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하는 깨달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_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건대?  이제 가족제도는 무의미해지는 거야? 결혼이란 제도는 폐기처분 되는 걸까? 그러면 미래에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하고 아이를 낳게 되는 거야?

남자_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본질이 아닌 것은 결국 변하기 마련이라는 거야. 가족제도의 본질은 우리가 맹신해왔던 것처럼 낭만적인 사랑의 결과도, 행복의 절대적 조건도 아니야. 실제로 많은 가족제도를 다루는 학자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낭만과 사랑의 유무가 결혼의 조건이 된 시대는 근대가 최초라고 말하고 있어. 심지어 우리의 조상들이 지금의 현대의 결혼제도를 보면 “어떻게 사랑만 보고 결혼할 수 있지? 결혼의 전제조건이 경제문제가 아니라 낭만이라?”하면서 의아해 할 거라고도 얘기해. 생각해봐 우리나라만 해도 연애결혼이 보편적인 결혼의 조건이 된 역사가 얼마나 되냐고? 100년도 안돼.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들만 해도 중매결혼이 일상이었어. 지금 우리는 낭만적 사랑의 결과은 결혼이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에 속아 사기결혼들을 서로에게 감행하고 있는 거야.

여자_ 그 말은 너무 잔인해. 어떻게 사랑 없이 결혼할 수 있어?

여자는 말을 내뱉어놓고 속이 뜨끔했다. 여자가 남자를 선택한 이유도 역시 낭만적인 사랑 때문은 아니었다. 생활의 안정감. 나쁘게 말하면 넉넉하지 않아도 매달 정기적으로 돈을 착착 벌어다 안겨줄 성실한 일꾼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좋게 말해 힘들 때 의지할 상대를 얻었다는 평안이 결혼의 큰 만족 요인이었다. 낭만적 사랑을 말하자면 옛 남자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느새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여자도 이미 낭만적 사랑으로 인한 결혼은 아이들의 불장난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여자는 생각했다. ‘아 그렇다면 낭만적 사랑으로 포장되어 있는 지금의 결혼제도, 가족제도도 결국 그 본질인 생존을 위한 경제적 계약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건가?’

남자_ 당신은? 당신은 아직도 나를 사랑해? 그래서 아직 나랑 살고 있는 거야? 돈 때문, 아이들 때문이 아니고? 마땅한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고? 아직은 거친, 이혼녀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 없어서가 아니고? “

여자는 마음을 들킨 듯, 남자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남자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는다. 이미 그의 표정에서는 초월한 듯 어떠한 강요나 원망이 묻어 나오지 않는다. 묵묵히 까만 하늘만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입을 뗀다.

남자_ 행복은 뭘까? 설사 행복이 뭔지 알아도 과연 그것을 얻기 위해 용기 낼 수 있을까? 나도 역시, 모든 것을 알고도 여전히 그 잘못된 줄을 벗어날 준비도 용기도 얻는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저 답답한 마음으로 현실을 힘들게 감당해 낼 뿐이야. 그럼에도 분명한 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우리가 절대적 진리라고 알고 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상대적 조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될 거라는 거야. 왜?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하고 성인이 다 된 자식들이 부모에게 의지해야 하는 거지? 종족번식은 꼭 일부일처제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거야?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사랑의 종착역은 꼭 결혼이어야 해? 생존을 보장해 주지 않는 사회 현실에서 가족제도는 앞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까? 그리고 존속한다면 어떤 형태로 살아남을까?

여자_ 미안해. 당신 이러다 머리가 폭발하겠어. 오늘은 그만하고 좀 쉬자.

여자는 애써 남자를 진정시키고 대화를 중단시켰다. 결혼의 전제조건을 사랑 인양, 그래서 한 사람과만 사는 게 행복하냐는 질문에 발끈하여 대화를 시작한 여자이지만,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신도 오로지 사랑만을 이유로 남자랑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불륜이니 바람이니 하는 얘기들이 과연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은 결혼에도 해당하는 걸까? 겉으로는 다들 사랑으로 잔뜩 버무린 팥빙수 마냥 달콤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척 또 했던 척하지만, 이미 현대의 결혼도 낭만적 사랑이 전제조건으로서 영향력을 잃은 지 오래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조건으로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누군가는, 배우자에게 낭만적 사랑을 전제로 한 정절과 감정의 일편단심을 요구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여자는 대화를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화가 더 진행되었다간 현재의 자신으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내용들을 직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자는 아직 그럴 준비도 용기도 없었다.

사람들은 진실을 불편해하기 마련이다.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끝이 났지만 여전히 동은 터 오르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가장들의 피곤한 발소리가 새벽 마당을 두들긴다. 멈추어 있는 것 같아도 지구는 지금도 하루에 수천km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 일상의 삶이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지만, 인류의 역사는 지구의 자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직면하기를 미루고 미루어도 같은 모습으로 내 곁에 남아있는 것은 말없이 몇만 년 몇억 년을 지켜온 바위들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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