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빅 엿’

by mmerlin

[멀린’s 100] 2018.01.03 l M.멀린  

나는 운이 없을 뿐이다.

수리야 보날리는 프랑스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입니다. 그녀는 흑인입니다. 그녀의 주특기는 백플립입니다. 빙판 위에서 백덤블링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백플립은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알베르빌올림픽 이후 보날리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세 번에 걸쳐 세계선수권대회 2위를 차지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1994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역사상 최고의 스캔들이 일어났다. 보날리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3명이 출전하지 않은 것도 유리했다. 기술적 기량도, 예술적 기량도 절정에 오른 상태였다. 일본 대표 사토 유카도 좋은 선수였지만 보날리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뒤 금메달은 사토에게 돌아갔다. 분노와 실망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던 보날리는 시상대에 올라서길 거부하고 얼음 위에 섰다(아래 동영상). 시상자가 그의 손을 잡고 억지로 시상대에 올려야만 했다. 보날리는 은메달을 목에 걸자마자 벗어버렸다. 아이스링크에 관중의 야유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보날리는 마이크를 갖다 대는 기자들에게 딱 한마디를 남겼다. “저는 그냥 운이 없습니다.” _ [우리에게는 더 많은 백플립이 필요하다]

 4학년 2학기의 반장선거

초등학교 4학년 2학기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당시에는 국민학교였던 때였습니다.) 다니던 시절에는 반장선거를, 선생님이 5~6명의 후보를 지명해서 칠판에 적고는, 약식으로 정견발표를 하고 선거를 치러 뽑았습니다. 5共 시절이었으니, 초등학교의 반장선거도 체육관 선거를 닮아 있었습니다.

선거는 요식행위일 뿐, 언제나 반장은 이미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왜 있잖습니까. 올 백에 올 수, 만능 스포츠맨을 자랑하는.. 어느 반에나 있는 우등생 말입니다. 짜증 나게 그냥 ‘얘가 반장이다’ 하면 될 것을.. 말뿐인 민주주의를 흉내라도 내려고, 꼭 후보를 5~6명씩 불러 올려다, 선거 아닌 선거 시늉을 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런 요식행위에 들러리이자 희생양이었습니다. 선생님이 반장을 지명하는 2학년을 지나서, 3학년부터는 매 학기의 선거 때마다 칠판에 이름이 적히는.. 반장 후보 명단에 반강제적으로 올라야 했습니다.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성적순이었는지, 키 순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모든 선거가 그렇듯, 초등학생들의 반장선거 또한 인기투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년시절, 어른들은 우량아라고 부르고, 아이들은 돼지라고 부르는 체격을 가졌던 제가.. 인기가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게다가 초등학생의 문화라는 게 말그대로 ‘승자독식의 세계’ 아닙니까? 매번의 선거에서 반강제적으로 불려 올라갔던 저는, 매번 0표 내지는 짝꿍들의 동정표가 더해진 1~2표의 굴욕을 맛봐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반장 후보에 올랐단 자체가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겠지만.. 매번 0표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감수성 예민한 유년시절의 사내아이가, 받아들이기 쉬운 스트레스는 아니었을 겁니다. 결국 저는 4학년 2학기의 반장선거에서 정견을 발표하라는 (빌어먹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불려 나온 주제에 정견은 무슨 정견이란 말입니까?) 교탁 앞에 서서..

“저는 기권하겠습니다.”

하고 선언해 버렸습니다. 순간 교실이 잠시 얼어붙은 듯 싸~ 해지더니 이내 정말 빵! 하고 터져버렸습니다. “기권? 기권.. 기권?!!!! 푸하하하 기권이래!!” 기권이란 말이, 당시의 동급생들에게는.. ‘그 뜻은 알고 있으나, 사용처가 모호한..’, 매우 낯선 단어이면서, 또한 언제나 도전적이고 긍정적이어야 할 초등생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금기어 같았나 봅니다.

그 상황이 왜 웃음바다가 되어야 했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더 당황스러워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왜 기권을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매번 떨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후보에 오르는 게 싫고.. 이런 식의 선거라면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옅은 웃음을 지으시며 별말씀이 없으셨고, 아이들은 웅성웅성 대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조치도 없이.. 저의 기권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로.. 선거는 강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랍니까? 그 선거에서 저는 당당히 18표를 획득하고.. 물론 낙선하였습니다. 18표.. 칠판에 적힌 ’18’이란 숫자가 지금도 또렷하게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이런 18..

초등학생 때, 반장 한 번 안 해 본 놈 있느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저는 그 후로도 초등학생 시절 내내, 반장은커녕 부반장도 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4학년 2학기의 그 선거는 제 평생에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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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0표 내지는 1~2표에 그쳤던 저는 어떻게 18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비록 동정표일지언정, 18명의 아이들은 적어도 저의 초등학생답지(?) 않은 행동에 지지를 표해 주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저는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복도에 지나가면 ‘쟤가 그 반장선거에서 기권한 얘래..’ 하는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하고.. 어떤 여학생이 찾아와서 “너가 반장선거에서 기권한 얘라며? 우리 엄마가 너 어떤 얜지 보고 싶대”라는 이상한 제안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 엄마는 왜 제가 보고 싶었을까요? 심지어 다음 해 반장선거에서는, 제가 올해도 기권을 할 건지, 안 할 건지가 최대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 때문에 제도가 바뀐 건지, 아니면 고학년이 되면 원래 선거제도가 바뀌는지는 모르지만.. 5학년이 되자, 선거가 자율 선거로 바뀌었고, 추천을 받거나 스스로 반장선거에 입후보해야 후보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의 선거에 당연히 입후보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왜 그럴까요? 어린 소년의 생각에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습니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당하게(?), 후보에 오르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며.. 그것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거부했는데, 그게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고.. 혹은 지지를 받기도 하는 요상한 세상 말입니다.

세상은 편파적이다.

세상은 편파적입니다. 역사라는 것이 ‘정正-반反-합合’의 과정을 통해 발전해 간다면, 더더욱 세상은 언제나 ‘정正’과 ‘반反’, 어느 한 쪽에 기울어 있는 것입니다. 비록 어떤 시대를 만나 ‘정正’과 ‘반反’ 사이에 위치하게 된다 해도, 그것은 ‘정正’ 또는 ‘반反’ 어디론가 이동 중인 일시적 상태일 뿐입니다. 그래서 개인이 세상의 논리와 반대쪽에 위치하게 될 때.. 우리는 ‘이런 18, 조가튼 세상..’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이 약육강식의 자연 질서 속에서, 여지껏 살아남아 생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나라는 존재는 6.25 때 일족이 몰살 당하지 않은 덕, 임진왜란에서 살아남은 조상의 덕, 거슬러 거슬러 올라 가, 대홍수에도 살아남은 노아의 덕에 세상을 경험하게 된.. 운運 좋은 종자일 테니 말이죠.

‘저는 그냥 운運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날리 선수의 억울함은 시상대에 올라서지 않고,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그 표정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운運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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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운運이 없었을 뿐입니다. 흑인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남들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남자 선수들도 하기 힘든 백플립을 멋지게 해낼 수 있다는 것. (덕분에 관계자들의 눈밖에 났을지라도..) 그리고 매번의 세계대회를 공교롭게도 자국이 아닌 외국, 특히 일본에서 해야 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운運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조건을 감안하고서도 보날리 선수가 금메달을 따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녀에게 금메달 수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운運을 따지자면, 흑인으로서, 피겨선수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태어난 것조차 큰 운運이었을 것입니다. 백플립과 같은 대단한 기술은 탄력이 좋은 흑인이 아니었으면 하기 어려운 기술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가 불운하다고 여기는 조건들은, 그녀를 피겨를 하게 해 줄 수 있었던 좋은 운運의 조건이었습니다. 매번 굴욕의 선거를 거쳐야 했던 소년이었지만.. 한 번도 반장선거 후보에조차 못 올라본 많은 동급생들보다는 운運이 좋았던 겁니다. 그 기준이 무엇이었던들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나의 탓도, 세상의 탓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늘의 탓, 운運의 탓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늘에 ‘빅 엿’을 날려야 합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내게 금메달 수여를 거부한 운명의 여신의 탓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운명의 여신에게 ‘빅 엿’을 날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운명의 여신이 설계한.. 인과응보의, 운명運命의 질서이니까요.

운명에 ‘빅 엿’을

뭘 해도 안되는 인생이 있습니다. 번번이 국제 대회에서 편파판정에 쓰라린 고배를 마셔야 했던, 운運 나쁜 보날리 선수처럼.. 마법사의 인생에도 굴욕의 반장선거와 같은 일들이 번번이 되풀이되었습니다.

노력이 모자랐다고, 실력이 모자랐다고 하기에는 납득하기 어려운.. 누가 보기에도, 운運이 모자랐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결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팔자 때문인가..’ 싶어 사주를 보니, 정말 사주팔자가 개판이었습니다. ‘이런 팔자를 가지고.. 고생했네..’ 스스로 위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긴 하지만, 보날리 선수도 관운官運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면 끝입니까? 어쨌든 피겨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반장선거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운運이 좋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하면 할 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개망신을 당하고 부당한 피해를 입은 것을, 운運 탓으로만 돌리고 수용해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매우 교만한 태도입니다. 운명運命이 우리를 거부할 때, 우리는 운명運命에 ‘빅 엿’을 날릴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운명運命은, 그런 불운한 자의 반격으로 ‘정正’–’반反’을 넘어 ‘합合’의 진화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운명에게 ‘빅 엿’ 날리기..

그것은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후보로 올렸으니, 나는 ‘기권’이라는.. 5공시절, 국민학생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사회적 금기를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진화해 가는 것입니다. 불운한 자들의 궐기와 저항은 세상에 긴장을 더하고, 가진 자들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합니다. 정(正)은 정(正)대로, 반(反)은 반(反)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경쟁함으로써, 우주는 끝없는 진화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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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것은 겸손이며, 불운한 자의 의무입니다. 멋지게 운명에 ‘빅 엿’을 날리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500년 전, 마르틴 루터는 독신 사제를 거부하고 수녀와 결혼을 함으로써, 그들의 신에게 ‘빅 엿’을 날렸습니다. 찰스 다윈은 생물의 유전적 진화를 선언함으로써, 당대의 신에게 ‘빅 엿’을 날렸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빅 엿’을 날린 비주류들의 저항으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항

보날리는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지만 도무지 기준을 알 수 없는 편파 판정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다. 보날리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 지바에서 엄청난 야유를 들으면서도 은메달을 목에 걸기 거부한 이유도 10여 년간 흑인 선수라는 사실 때문에 알게 모르게 가해진 편파 판정 때문이었다. 어쩌면 1998년 나가노는 보날리가 올림픽 메달을 거머쥘 마지막 기회였을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피겨스케이터의 생명은 꽤 짧은 편이다. 그러나 보날리는 쇼트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기술을 완벽하게 소화해도 예술점수로 편파 판정에 시달리는 판에 큰 기술을 실패했으니 롱 프로그램을 잘 소화해도 메달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날리는 피겨스케이팅의 세계에 엿을 먹였다. 롱 프로그램이 거의 끝나가는 순간, 그는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백플립을 해버렸다(아래 동영상). 피겨협회가 강력하게 금지하고 있던 기술을 마지막 올림픽 무대에서 터뜨려버린 것이다. 보날리는 백플립 때문에 기술점수에서 엄청난 감점을 받고 결국 10위로 마무리를 했다. 결과가 나오자 관중의 야유가 빗발쳤다. 보날리를 향한 야유가 아니었다. 부당한 심판들과 경직된 피겨계를 향한 야유였다. _ [우리에게는 더 많은 백플립이 필요하다]

 나는 보날리 선수의 마지막 ‘백플립’을 보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지난 불운했던 역사들이 주마등처럼 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백플립은 세상에서 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빅 엿’이었습니다. 이후 보날리 선수 사건으로 인해, 피겨스케이트의 채점방식이 전면적으로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뭐 그러나 지난 2014 소치올림픽 김연아 선수의 은메달 사건에서 보듯, 그 편파적인 세상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빅 엿’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88만 원, 77만 원.. 3포, 4포, 5포를 넘어 N포 세대까지.. 자꾸 다운되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가혹한 운명에 맞서, 세상에 어떤 ‘빅 엿’을 날릴지 기대하고 있습니다. 굶어 죽더라도, ‘빅 엿’을 날려주기를.. 스스로를 미생이라 여기고, 자책하며, 자꾸 물러서지 말고.. 엿같은 어른들에게 제발 ‘빅 엿’을 날려주기를.. 결혼 거부, 출산 거부로 강렬하게 맞서, ‘노예를 낳아달라’는 어른들에게, 제대로 된 ‘빅 엿’을 날려주기를.. 그러나 반장선거를 포기했던 소심한 소년처럼 ‘기권’에서 머물지 말고, 보날리 선수처럼.. 그들이 보는 눈앞에서..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백플립’을 펼쳐, 당당하게 엿 먹여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무술년 황금 개의 해에, 불운한 개새끼들의 강렬한 저항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오기를.. 그래서 엿 같은 세상에 제대로 ‘빅 엿’을 날려주기를.. 기대하고 고대하며 새해를 맞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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