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비행 順天飛行

[교토바다 단편선] 에필로그

 

 

 

 

 

무진에는 안개가 끼지 않았다. 무료한 사내를 잡아끈 무진에는 청명한 봄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를 무진으로 이끈 힘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내의 유년 시절을 기록해 두었던 순천의 정서였다. 한 번도 와보지 못한 도시에서, 사내는 자신의 유년 시절의 정서가 기록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공기의 밀도이고 바람의 위로였다.

기차에서 내려서며 사내는 지난날을 뒤돌아본다. 그의 유년 시절, 뚝방길에서 느꼈던 바람의 기억이 그에게 남아 있다. 사내는 걷기를 멈추지 않고 어디로든 쏘다녔다. 소년이었던 사내에게 공기의 밀도와 바람의 감촉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만의 언어였고, 소통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관계의 기준점이 되었다.

“무진은 처음이세요?”

“순천은 한 번 왔었는데 무진은 처음이네요.”

“그렇군요. 순천은 무진과 다르답니다.”

“네. 그런 것 같네요. 그런데 저는 순천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안개가 끼지 않아서 그런지..”

사내에게 바람의 여신이 말을 걸었다. 사내는 순천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무진의 무책임한 안개는 달갑지 않다며.. 안개는 무책임할 수 밖에 없다. 안개 속, 안개 너머의 무엇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을 통과해 왔다. 매번 안개에 배반당하며. 신기루처럼 그 뒤에 무언가 좋은 것이 있을 거란 안개의 유혹은 언제나 사내를 좌절케 했다.

“안개가 끼지 않아 다행이에요. 덕분에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동천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네요. 어디에서부터 흘러왔는지 모르지만, 바다에까지 이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요?”

“얼마나 지쳤을까요? 그런데 마침내 도달했네요. 따뜻한 바다, 갈대들의 박수 속에서, 수고했다고, 이제 그만 어머니의 품에 안기라고, 토닥거리는 갈대들의 함성이 귓가에 맴도는 듯해요.”

“흑두루미는 어떻구요. 품격있는 몸짓으로 날아올라 축하의 비행을 해주고 있어요.”

다리 아래 꼿꼿이 서 있던 흑두루미들이 하늘로 풀쩍 날아올랐다. 그들은 동천에 도도하게 서서 무심히 바라보다, 물고기들에 연연해하지 않고 훅하고 날아올랐다. 비행을 시작한 두루미들의 활공에는 날갯짓이 없다.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날갯짓을 생략한 채, 바람의 여신의 등에 올라타 유유히 바다를 향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그들은 바람의 길을 알고 있다.

“저렇게 살고 싶었는데.. 아등바등 했네요.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르진 않겠지만..”

“괜찮아요. 태어날 때부터 바람의 길을 알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그들은 모두 안개 속을 걸어간답니다. 그들은 아침을 살아가니까요.”

“아.. 그런가요..”

바람의 여신은 사람들이 아침을 살아가느라 안개에 파묻힌다고 말하고 있다. 아침. 그렇다 안개는 아침에만 나타난다. 해질녘 황혼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안개이다. 사내는 부산했던 지난 아침들을 돌아본다. 그것은 의지의 확인이었다. 살아내려는 의지. 얼굴을 내밀어보겠다는 의지. 남들처럼 살아보겠다는 의지. 그러나 자연은 아침에는 안개를, 저녁에는 황혼을 짓는다. 사람이 이에 반하여 달리기 때문에 우리는 불쑥 안개 속에서, 짙은 안개에만 갇혀 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황혼을 쫓았어요. 저는 언제나 저 붉은 빛이 좋았거든요.”

“바람에게도 꿈은 황혼이에요. 우리는 저 노을을 쫓아 온 세상을 돌아다니죠. 그러나 안개는 우리를 싫어해요. 우리가 부재한 곳에서 피어나니까요.”

“당신을 쫓다 보면 안개를 만날 일이 없겠네요.”

“하지만 비바람을 만나게 될걸요.”

“네 맞아요. 그래서 내 삶은 온통 비바람투성이였어요.”

안개를 떠나 황혼을 쫓는 이들의 삶에 비바람이 넘친다. 그들은 아등바등 안개를 벗어나 노란 황혼빛을 쫓는다. 그곳에 밤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달이 뜨고 별이 빛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 속을 걷는 이들은 해도 달도 별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과만 걸어간다. 눈앞도 분간할 수 없고, 뒤도 옆도, 모두 거울처럼 둘러쳐져 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멈추어선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는 책임질 일이 없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래서 쉰다고 생각하죠.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공간에서 사람들은 쉴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공간은 비어 있을 뿐이에요. 텅 빈 공간에서는 아무도 쉴 수가 없어요.”

“그때에는 나를 부르세요. 바람이 불어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죠. 그리고 선택해야 해요. 타 오를 것인지, 맞설 것인지.”

“나는.. 나는 맞섰던 것 같아요. 당신을 타고 왔다면 진즉에 순천에 왔겠죠. 진작에 바다에 이르렀을 거예요. 하지만 맞섰어요. 안개를 극복하고 싶었으니까요. 제자리에서 안개를 또 기다렸죠.”

사내는 온통 안개를 맞았다. 안개는 나타났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사내는 바람을 부를 수 없었다.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다.

“안개 속에서 나는 책임을 부르짖었죠. 그래서 다시 안개가 찾아오기를 기다렸어요. 나는 책임지는 자이니까. 그러나 안개는 언제나 절망을 안겨주었죠. 보이지 않는 것을 책임질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왜 멈춰 서 있었죠? 내가 찾아간 일도 여러 번이었어요. 나를 타고 올랐다면 오히려 당신은 온 세상을 여행할 수 있었을 텐데, 수많은 황혼을 지켜보았을 텐데..”

“지금은 늦었나요?”

“바람은 언제든 불어오죠.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구요. 선택은 당신의 몫이에요.”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안개 속에 머물러 있던 그 시간이 없었다면, 당신을 이렇게 간절히 바라진 못했을 거예요. 결국 깨닫게 되기 전까지..”

“무얼 깨달았죠?”

“안개도, 황혼도, 바다도, 당신도,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자리에 있다는 걸 말이죠. 멈추어 선 것은 내가 아니었어요. 나는 모두를 찾아 이리저리 왔다 갔다만 했죠. 그리고 나는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사내는 떨어져 내리는 태양 빛 속에서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었다. 멈추어 서, 맞선 줄 알았던 지난 시간,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 연인들, 전생들이 그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가 따라 떠나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떠나지 못했던 이유 역시 알고 있었다. 무얼 좋아하는지 몰랐으니까.

“노을이 지고 있어요. 이제 해는 떨어졌고 달이 떠올랐네요.”

“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내 곁에 있네요.”

“후후 이제 아시겠어요. 바람은 언제나 불어온답니다. 그리고 내 등에 올라타면 우리는 헤어질 일이 없어요. 안개는 사라지고, 해도, 달도, 별도, 하루에 절반은 이별을 고하지만, 나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 있죠. 나의 등에 올라타기만 한다면..”

바람의 여신은 언제나 등을 내어주고 있다. 우리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고, 그녀의 손길은 우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준다. 그러나 그것은 순천에서의 일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순천에서의 느낌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불어오는 바람만이 그것을 내어준다.

“다른 곳에서도 당신을 만났지만, 매번 거칠거나 덥거나 춥거나 했죠. 그래서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없었어요.”

“나와 달리 안개는 언제나 한결같죠. 그래서 사람들은 안개에 중독이 돼요. 그래서 순천이 아닌 무진을 찾죠. 그러시겠어요? 그렇게 언제 올지 모를, 자기 마음대로 찾아왔다 사라지는 안개 속에 머무시겠어요?”

“그건 충분히 했어요. 이제는 그렇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당신을 만났으니까.”

사내는 바람의 여신을 만났다. 책임도 무책임도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왔기 때문이니까. 바람을 맞았기 때문이니까. 여신의 결정을 따를 뿐, 날개를 쭈욱 펴고 그의 등에 올라타면 되는 일이니..

“등에서 날개가 솟아났을 때 그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무얼 말이죠?”

“날개가 날게 해주는 게 아니란 걸 말이죠. 날개를 퍼덕여서 나는 게 아니란 걸 그때는 모르고 있었어요. 날개는 다만 바람의 길을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줄 뿐인데, 나는 날개를 퍼덕여 날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떨어져 내렸죠. 절벽에서..”

“저런, 실은 나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언제나 내가 없는 곳에서 떨어져 내리더군요. 그러면 내가 받아 줄 수도 없는데 ..”

“맞아요. 절벽 아래에는 언제나 당신이 없더군요. 하지만 그 아래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어요. 그래서 뛰어든 거죠. 그것은 중독이었을까요?”

“그건 나도 몰라요. 나는 안개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해요. 나는 것은 날개가 아니에요. 불어오는 것은 바람이고 나는 것은 나와의 만남이에요. 서로 손잡으면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죠. 그리고 당신은 달려와야 해요. 내가 있는 곳까지, 나의 품에 올라탈 때까지 솟구쳐 올라야 해요. 그때에는 날개가 유용하죠.”

“몰랐어요. 제 자리를 떠나기 위해 날개를 펴야 한다는 걸. 당신을 만나기 위해 솟구쳐 올라야 한다는 걸. 내가 아는 것은 안개 너머, 태양 빛이 쏟아지는 대지 위를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려야 한다는 것뿐이었어요. 그래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렇게는 날 수가 없는 거였어요.”

동천에 짙은 석양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바람은 사내의 뺨을 어루만지고 사내는 굵은 눈물방울을 주렁주렁 흘려내었다. 사내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는 동천 여기저기에, 둥근 동심원이 그려지고, 방울의 파장을 따라 붉은 기운이 흩어져 갔다. 바람의 여신은 사내의 등을 어루만지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접혀있던 날개를 조심스럽게 펴 주었다. 날개는 억지스런 동작으로 생긴 상처에 딱쟁이들이 앉아 있었고, 깃털은 여기저기 빠져나가 듬성듬성해져 있었다.

“아.. 이렇게는 날아오를 수 없겠는 걸요. 거친 세월을 살아오셨군요.”

“네.. 날개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어요.”

바람의 여신은 순천만의 돌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 사내의 날개를 치유하기 시작했다. 순천만의 숨 쉬는 돌들에게서는 독특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고, 이 향기는 지친 근육들을 소생시키는 데 큰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시 날 수.. 아니 나도 날 수 있을까요?”

사내는 바람의 여신에게 물었다. 나도 날 수 있겠냐고 말이다. 다시 날 수 있겠냐고, 아니 한 번도 제대로 난 적이 없으니 이제는 날 수 있겠냐고 말이다. 그렇다. 그간의 사내의 날갯짓은, 그간의 비행 시도는, 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무모한 내던짐이었을 뿐이다. 책임과 무책임의 경계에서 자리를 보전하려는 막무가내였을 뿐이다. 하지만 자연은 언제나 냉혹하다. 의도와 동기를 따지지 않고, 단지 몸짓과 행위에 따라 보상할 뿐인 것이다. 사내에게 결과는 언제나 상처였지만..

“날개가 있으니까요. 상처는 아물게 되어 있어요. 그건 자연의 위대함이죠. 그리고 나를 만났잖아요.”

“네 당신을 만났어요. 순천에서.. 나는 어리석게도 무진에서 당신을 기다렸지만.. 당신은 순천에 살고 있었던 거예요. 왜 나를.. 나를 찾지 않았어요.”

사내는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람의 여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며 쓰담쓰담 해줄 뿐이다. 찾지 않은 것은 사내이지, 바람의 여신이 아니었으니까.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는 안개가 머물지 못하니까. 사내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사내는 울고 싶은 것이다. 사내는 바람에게 자신의 슬픈 세월을 고해바치고 싶을 뿐인 것이다.

“무언가 있을 줄 알았어요. 안개 너머에,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나의 자리가 있을 줄 알았어요. 그래서 모두에게 호언장담하기도 했죠. 안개만 걷히면, 안개만 걷히면 두고 보라고.. 그런데 막상 안개가 걷히고 나면 나의 자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죠. 나는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는 그림자도 더욱 강렬해졌어요. 짙게 드리운 그림자는 나를 삼킬 듯이 덤벼들었죠. 도망치고 도망쳐도 계속 따라오는 그것을 나는 이길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안개 속으로, 안개 속으로 돌아왔죠. 안개 속에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까요.”

“나와 함께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그림자는 당신의 발끝에서 떨어져 대지에 머물죠. 날아오른 당신은, 높이 오를수록 그림자에게서 멀어져요. 그림자가 당신을 여전히 쫓기는 하지만, 언제나 동경하죠. 그는 하늘 위로 날아오를 수 없으니까요. 그는 대지에 갇혀 있으니까요.”

“그걸, 그때에는 알지 못했어요. 다만 안개 속에서는 그를 외면 할 수 있었죠. 그래서 자꾸 숨어들었어요. 절벽 위에 서 있는 줄도 모르고..”

“다들 그래요. 그리고 나를 무서워하죠. 비바람, 태풍이 나의 모든 면모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조차 그대에게 유익해요. 새롭게 되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혼자될까 봐 두려워해요. 안개 속에는 갇힌 이들이 많거든요. 사방은 보이지 않아도, 함께 안개 속에 갇힌 이들은 바로 보이죠. 그들과 두려움을 나누는 일은 위안이 돼요. 어쨌든 혼자는 아니니까.”

“무슨 소리예요. 그건 위로가 아니에요. 두려움을 증폭시킬 뿐이고, 어디선가 덮쳐오는 그림자의 희생양이,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거짓 안심을 줄 뿐이에요. 공포의 동료애는 이기적일 뿐이라구요. 하지만 나의 등에서는, 날아오르는 수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요. 그들은 세상의 이곳저곳에서 홀로 날아올라요. 나의 등에 타려구요. 당신은 그들과 조우해야 해요.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요. 그들은 수도 없이 추락하지만, 다시 나의 등에 올라타지요. 높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을 잊을 수 없거든요.”

“아.. 그들과 만나고 싶어요. 그들은 어떻게 생겼죠?”

“그들의 얼굴엔 희망과 슬픔이 가득해요.”

“네? 슬픔이라구요? 희망은 알겠는데 슬픔은 뭐죠?”

“날아오르는 자들의 슬픔.. 아직 그걸 모르는군요.”

바람의 여신은 날아오르는 자들의 슬픔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것은 지는 석양의 슬픔과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했다. 안개 속 무리들의 곁을 떠날 때, 자신도 데려가 주기를 갈망하던 멈춰선 자들의 눈빛을 잊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들은 날아오르는 자들을 갈망하다 이내 저주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저주가 자신들의 자리를 정당화하고 안개 속 연대의 결속을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날아오른 이들의 가슴 한켠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을 향한 슬픔이 언제나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그래서, 때로는 나와 함께 비바람으로, 태풍으로 몰아치죠. 안개 속 그들의 삶을 흩어놓기 위해 매섭게 몰아치죠. 그건 거짓이니까요. 그들 중 일부는 날아오른 옛 동료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분노해요. 인정하지 않고 폄하하죠. 하지만 몰아치는 폭풍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안개 속 그들을 깨어나게 할 수 없으니까요.”

“아.. 내게 불어온 폭풍 속에도 그들이 있었겠군요.”

“아마도..”

사내는 착잡한 심정에 사로잡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바람과 함께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아 보여 마음이 어려워지는 것이다. 안개 속 그들과의 연대는 달콤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내 삶을 들여다보고 애정을 쏟는다. 물론 그것은 관심을 넘어 일종의 그물로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동병상련의 연대를 떠나지 말 것. 배신하거나 이탈하지 말 것. 연민의 대가는 매우 크다. 이탈은 곧 저주로 변환되니까.

“그들을 떠난 지 오래예요. 다시 안개 속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어요. 무진 말이에요.”

“아니요. 저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드리우는 황혼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날아오르겠어요. 다시는 안개 속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사내는 바람의 여신에게 자신의 다짐을 말했다. 황혼과 해풍을 맞으며 남은 생을 살겠노라 다짐하며, 여신의 등에 올랐다. 날개는 상처 입고 굳었지만, 사내의 결심을 담아내지 못할 만큼 꺾여 있지는 않았다. 뒤뚱뒤뚱한 날갯짓이었지만 기어코 사내는 바람의 등에 올랐다. 몸이 떠오르고 바람의 여신은 부드럽게 순천만의 상공을 회전했다. 사내는 바람의 여신의 등에서 저 멀리 남쪽 바다를 바라보며, 허파 가득 신선한 공기를 채워 넣었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 그리고 내려다본 땅에는, 저 멀리 작은 인형 정도의 크기로 쪼그라든 사내의 그림자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제는 작별이다. 사내가 내려앉기까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괜찮아. 원래 우리는 떨어져서 동행하기로 했던 거야. 존재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추락하기 전에는 너를 만날 수 없어. 섭섭해 할 필요도 없어. 너무 오랜 시간 붙어 있었으니..’

사내는 쪼그라드는 그림자에게 작별을 고하려 지상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그림자는 다시 커져서 사내에게 작별의 악수를 청하였으나 사내는 그 손을 잡지 않았다. 아직은 비행이 서투르니.. 사내는 그림자를 뒤로하고 다시 상공으로 후르륵 날아오른다. 활공하는 사내의 뒤로 무진의 안개빛 팻말이 달빛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궁금해진 사내는 다시 저공비행을 하며 팻말을 소리 내 읽었다. 거기에는 선명한 손글씨로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씌어 있었다. 사내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

바람의 여신의 등에 올라탄 사내는 순천 상공을 비행하며 조용하고 단호한 다짐을 내뱉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나는 바람을 따라 흉내낼 수 없는 삶을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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