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마에, 리더십의 해방구가 되다

2008.11.26

 

요즘 리더십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진 듯합니다. 섬김의 리더십, 어머니 리더십, 돌고래 리더십.. 종류도 많고 내용도 가지각색입니다. 온통 다들 리더만 하고 싶어 하는지, 이런 류의 책들과 교재들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하나가 히트하면 비슷한 아류작들이 연이어 쏟아집니다. 더 이상 회사가 자신을 평생 고용해 주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의 리더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불안에 빠져드는 것 같습니다. 적자생존의 조직 시스템 속에서 피라미드의 하층부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져 안타깝기도 합니다.

한동안 리더십 이론은 효율성 극대화와 신속한 의사 결정 등 단기적인 결과와 성과창출에만 몰입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서 리더십이 수량화 되고 계측 가능한 지표로 제시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단기적 성과에만 집착하는 리더십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었고, 팀원들과의 불화, 미처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의 대처가 어려운 측면 등 많은 문제점을 내보였습니다. 그러자 부드러운 리더십, 섬김의 리더십, 팀원들과의 상호소통을 강조하는 리더십 등 개방적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리더십이 새롭게 조명되었습니다. 상사와 팀원들 간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일을 함께 수행하며 대등한 관계에서 역량과 역할에 따른 합리적인 업무 수행을 독려하는 이러한 리더십은, 소통과 대화의 새시대에 필수적인 리더십 유형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였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수많은 책을 보고 마음으로 다짐을 해도,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천사의 날개를 단들 날 수가 있겠습니까? 착한 척하고 들어주는 척해 보지만 속에서는 열불이 나고, 어려서부터 소통의 훈련이 되어있지 못한 사람들이 팀원으로 모여 중구난방 자기 얘기만 해대고, 일은 진척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들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다 보니 사람들은 이상적이나 현실적이지 못한 이런 리더십에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70억 개의 리더십 유형이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살다간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유형은 더 셀 수 없이 많겠지요. 획일화된 사회를 살아가며 몇 가지 유형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사회가 다양화되고 개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리더십 유형 또한 사회분화의 정도에 따라 더욱 다양해지고 각각의 개성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따라 할 수 없고, 당신 또한 나의 리더십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스머프 마을의 스머프들이 외모는 비슷해도 성격이나 특징은 다 다르듯이,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수도 없이 다양한 리더십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들은 내 악기야.
난 오케스트라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거고
니들은 그 부속품이라고
아니 니들은 그냥 개야! 난 주인이고!
그러니까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짖으란 말야!

우리는 얼마 전 TV 드라마(베토벤 바이러스/MBC)를 통해 단원들을 자신의 악기라고 똥덩어리들이라고 몰아붙이는 몰지각한(?) 리더이자 마에스트로를 한 명 만나게 되었습니다. 컴플렉스와 편견, 거만함으로 똘똘 뭉친 이 제왕적인 리더, 이전 같으면 악플로 무장했을 이 어이없는 리더에게, 사람들은 매료되고 감명받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죠. 소통의 ‘소’자도 모르는 것 같고, 대화의 기본자세도 되어있지 않아 보이는 독재자, 게다가 무지막지하고 단원들에 대한 예의는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은 이런 리더에게 사람들은 왜 매력을 느끼는 걸까요?

 

가면을 쓰지 않은 상처 입은 마에스트로

강마에는 상처에 예민한 어린 시절부터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사람과 사람 간의 따뜻한 교감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모짜르트를 평생 따라잡을 수 없었던 살리에르처럼 늘 천재적인 재능의 친구와 스스로를 비교해야 했고, 궁핍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자신과 싸워야 했던 피곤이 누적되어 누군가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를 전사처럼 강인하고, 야수처럼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예민함 속에 자라게 했고, 자기 스스로를 완벽주의자로 완성해 가는 밑거름으로 삼게 됩니다. 세상은 싸워 이겨야 할 적이고, 자신은 누구에게도 의탁하거나 의지할 수 없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여기게 됩니다. 독선적이고 거친 언사에, 들어가는 오케스트라마다 갈등을 일으키고 떠나게 돼도, 자신의 존재 기반인 자존심만큼은 상처받게 할 수 없습니다. 이 거친리더에게 세상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살아남아야 하는 전쟁터이니까요.

똑똑하면 한가지 안 좋은 점이 있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남보다 빨리, 
일찍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딱 감이 오더군요.
부자는 계속 부자고 가난뱅이는 계속 가난뱅이구나.
고로 나는 죽을 때까지 이 모양, 이 꼴이겠구나.
그래서 대신 키운 게 자존심이었습니다.
대통령 아들보다 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죠.

견딜 수 없는 고난이 지속되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거나, 또 어떤 사람들은 비굴한 자기 비하에 빠져 주눅 든 인생을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가면을 씁니다. 가면. 자신의 인생이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누군가가 되기 위해 평생 흉내 내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강마에는, 아니 강마에의 삶은 그에게 가면을 쓰는 것을 허락치 않았습니다. 철저히 벌거벗긴 채 그를 적나라한 현실에 직면시킨 것이죠.

그렇게 버텼는데,
그것도 물난리가 나자 다 소용이 없어졌습니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냥 컨테이너에 사는,
지지리도 가난한,
그러면서도 수재의연금도 안 받겠다고 튕긴,
주제 파악도 못하는 거지일 뿐이었죠.
그때 저는
그래요.. 죽을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건 없었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십 분 정도 견디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방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름다운 음악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꿈인지 환상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거기서 오케스트라를 봤습니다.
그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먼 훗날의 나도 봤습니다.

구원이었죠.
위로였고,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운명이 살아내라고 벼랑 끝으로 몰아붙일 때, 우리는 인생을 포기하려 들어선 되지 않습니다. 그 절망의 절벽 끝에서야 그동안 잊고 있었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되니까요.
 
강마에는 그 처절하게 추락한 자존심의 끝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꿈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이상 가면을 쓸 필요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게 된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가면을 씁니다. 그러나 가면은 쓰면 쓸수록 얼굴에 더욱 밀착하고, 가면을 쓰고 관계한 사람들이 늘어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 집니다. 그러다 보면 가면 쓴 자신이 진짜 자신의 모습인 줄 스스로도 착각하게 되고, 그러한 모습에 안정감을 두고 살게 되죠. 그러나 가면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불편해도 함부로 내색할 수 없고 가면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정서적 교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스트레스는 쌓이고 갈증은 더해만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독’이라는 피난처, 아니 늪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마에가 부담스럽지만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그가 적어도 가면 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진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날 것 그대로입니다. 자상하고 친절하거나, 매너 좋고 인격적으로 보이는 태도는 여전히 그에게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왜나햐면 그것은 강마에가 아니니까요.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치유가 되지 않았다면 날 것이 드러나 보이는 그대로, 그는 단원들, 사람들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그의 거친 모습에 당혹스러워하지만, 가면을 쓰지 않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진정성,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떠나, 가면 뒤에서 이랬다 저랬다 연기하느라 느낄 수 없는 그 사람만의 향내를, 적어도 그에게서는 느끼고 그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모습 그대로, 그래서 거칠고 가시가 여기저기 돋쳤지만, 가면 뒤에 숨지 않은 그의 진짜 모습을 사람들은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관성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과 어떤 면에서 어떻게 소통하면 좋을지 소통의 방식을 제시해 줍니다. 일관성은 소통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지요. 가면 뒤에 숨어서, 이랬다 저랬다 하는 리더는 사람들로 하여금 소통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뒤통수를 치는 것은 아닐지,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되풀이되는 것은 아닐지 하는 염려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는 진실된 관계가 형성될 수 없지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른 아주 많은 경우의 수를 재보다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날 것 그대로여도, 일관성을 잃지 않는 강마에에게서 사람들은 적어도 그에게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되고 안 되는지, 관계의 질서를 익힐 수 있습니다. 강마에 또한 자신의 기준에 따른 일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관계 사이의 적당한 거리와 연민과 애증의 폭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를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물론 애정도 연정도 싹틀 수 있었지요.

 

열정 그리고 욕망은 리더의 힘

강마에가 솔직하고 자신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해서 그것으로서만, 그의 리더로서의 자질이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마에스트로로서, 그리고 리더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진정성’, 그리고 거친 언사만큼이나 농도가 진한 ‘실력’과 그것을 얻을 수 있었던 ‘용기와 힘’ 때문입니다.

이기적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은 너무 착해요! 아니, 착한 게 아니라 바보입니다!
부모 때문에? 자식 때문에? 애 때문에? 희생했다?
착각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꼴이 이게 뭡니까?
하고 싶은 건 못하고, 생활은 어렵고,
주변 사람 누구누구 때문에 희생했다
피해 의식만 생겼잖습니까!
이건 착한 것도 아니고, 바보인 것도 아니고,
비겁한 겁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백가지도 넘는 핑계를 대고 도망친 겁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이 꿈을 꾸지만 꿈을 이루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이 있고, 나름의 목표가 있지만, 매일매일 그것과 싸우고 실제의 성취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나가기엔, 우리는 핑계거리들을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강마에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두렵고 비겁해서 피하고 싶었던, 실은 그것만 넘으면 꿈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장벽을 그는 무슨 힘으로 넘었는지, 실은 모두가 알지만 인식하는 순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아 두려워 피해버렸던, 그 열망과 욕망.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내고, 결국 넘어서 버린 강마에 삶의 위대함을 목격하게 됩니다.

욕심.
넌 그걸 출세니 명예니
그딴 거로만 파악하는 모양인데
진짜 욕심은 그게 아니야.
이 안에, 니 열망이, 얼마나 드글드글 끓고 있느냐!
욕심은 다른 말로 힘이야.
얼마나 힘들고 뭐가 어떻게 가로막던 간에
다 뜷고 나오는 힘! 독기!
넌 결정적으로 그게 없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을 수밖에 없는 거.
그게 바로 절망이고 실현이고 실감이야.
그걸 거쳐야만, 니가 병 앞에 당당해질 수 있는 거야.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어. 난 그냥 이렇게 살아도 돼.’ 강마에의 말에 우리는 또 이렇게 핑계 대고 싶습니다. 세상은 운이고, 난 그저 운이 없어 이렇게 지지부진한 인생을 사는 거라고 피해 가고 싶네요. 그래서 고난과 어려움이 필요한가 봅니다. 적어도 막다른 골목, 인생의 바닥을 쳐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열망이 있습니다. 절망 앞에서야 비로소 내가 가진 능력과 힘을 알 수 있게 되는 우리 인생의 아이러니.

그래서요. 좀 친해졌으니까,
모자란 거 대충 덮어두고 뭉치자구요?
나 정희연이야 악쓰던 사람 어디 갔습니까?
개처럼은 안 살겠다.
거리에서 오보에 불던 사람은 죽었나요?
이 정도에 무너질 거면 악은 왜 쓰고,
거리 연주는 왜 했습니까?
다 쇼 한 거였습니까?
거지근성,
친한 걸로 어떻게 좀 빌붙어 보자, 거지근성입니다.
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아이고 난 못해..
거지들 특성이죠.
자기 힘으로 못하고 핑계만 많고 남들한테 얹혀서
어디 편한 길 없나 궁리만 하는 사람들.

리더는 가면 뒤에 숨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평생을 가면을 쓰고 살아 뭐가 진짜 자신의 모습인지 모르는 사람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죽겠다 덤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면 벗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적어도 꿈을 이루겠다 도전하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거지근성에 젖을 대로 젖은 사람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잔인하게 거울을 들이대는 그는, 적어도 그렇게 몰인정하기만 한 리더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상처 입어 거칠어진 그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 남아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또한 숨길 수 없어 보입니다.

 

강마에와 장준혁 그리고 이주완 과장

자신의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많은 리더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봅니다. 팀원들의 실력을 자신의 것 인양 포장하고 결과를 가로채고, 아랫사람의 생사를 움켜쥔 채 실낱같은 희망을 흘리며 착취하는 리더들. 이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누구든 그의 야망과 내심을 알수 있도록 드러내놓고 치사하니까요.

김명민이라는 배우를 매개로 강마에와 하나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드라마 <하얀 거탑>의 장준혁은 치열하게 자신의 목표를 돌진하느라 많은 적을 만들어 내지만,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교묘하게 사람을 이용하고는 고상한 척하고 있는 리더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느낌을 줍니다. 장준혁 주위로 몰려드는 추종자들 또한 장준혁의 성공을 자기 자신의 성공과 동일시하며, 적어도 기브앤테이크(give&take) 만큼은 확실한 그에게 리더로서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이지요.

같은 드라마에서 우리는 리더십의 과도기를 사는 이 시대의 대표적 ‘가면 쓴 리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장준혁의 선배 외과과장 이주완. 그는 자신의 비주류 출신성분 컴플렉스를 숨긴 채, 거침없이 성장하며 압박해 오는 장준혁과의 경쟁에서 평정심을 잃습니다. 페이스를 잃은 그는 평소 고매하고 고상한 척하던 가면을 유지하지 못하고, 어설픈 권모술수와 처세로 왔다 갔다 하다 결국 성장하지 못한 자신의 내면에 직면하고는 몰락해 버립니다. 가면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의 존경과 인격적 고상함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싶었던 이주완 과장 같은 캐릭터 역시 극한 상황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숨겨진 야망을 드러내고, 가면 뒤에서 썩을 대로 썩어 악취가 나는 절제되지 않는 내면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아마도 가장 악랄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장준혁’의 캐릭터는 ‘강마에’에 이르러서 한창 깊어지고 성숙한 내면을 보입니다. 개발독재 시절 보스형 리더들에게 익숙해 있던 우리들에게 민주화의 바람과 산업 성장이 가져다준 풍요는 인격적 리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처와 내면을 가졌는지 직면해 보지 못한 리더들에게, 우리는 성급한 인격적 리더로서의 역할을 요구함으로써, 치유하고 성장할 기회를 가져보지 못한 수많은 리더들로 하여금 자상해 보이고 모든 것을 들어 줄 것 같은 가면을 강요하게 된 것입니다. ‘있는 척하는 일’은 아무런 에너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흉내 내기에 불과하기에 곧 본색을 드러내게 되고, 앙상하고 초라한 껍데기만 남은 자기 자신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공을 향한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었던 의사 ‘장준혁’의 캐릭터에서 사람들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내면을 드려다 본 듯한 후련함을 가지게 됩니다. 그의 야망을 향한 돌진을 보며 가면을 쓰지 않은 날 것의 싱싱함을 경험하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성공을 눈앞에 둔 그의 죽음에 모두 가슴 아파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요?

‘장준혁’의 여운이 잦아든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연이어 등장한 ‘강마에’라는 캐릭터는 그저 성공만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했던 드라마 하얀거탑의 ‘장준혁’에게서 보다 훨씬 깊어지고 성숙해졌습니다. 마치 ‘장준혁’이 환생하여 새로 태어나 자신을 조금 성장시킨 듯, 이제는 적어도 인생의 가치를 성공이 아닌 행복에서 찾을 만큼 캐릭터 자체의 인생에 대한 이해가 자라났다고 할까요?

행복해?
고장 난 신호등 대신해서 허우적거리고
매연 냄새에 찌들어 가는 게
행복하냐고?

아~ 물론 인정해
사람은 누구나 제각각이라서
돈이 최고인 사람,
김치 한 조각에 밥만 먹어도 되는 사람,
그 돈 다 모아서 에디오피아 난민에게
보내놔야 다리 뻗고 자는 사람,
다양하지.

옳고 그른 건 없어.
다 자기 가치에 따라 살 뿐이야.

그래서 넌,
니 가치에 따라 행복 하냐구? 

우리는 두 번에 걸친 이 악역 캐릭터 신드롬에서 우리 사회의 리더십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공감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돈과 야망만 밝혔으면 좋겠다는, 그러면 알아서 이리저리 재보고 따라가든지 말든지 할 텐데. 또는 거칠고 매너 없고 날카롭지만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보이고, 그래서 적어도 어떻게 반응하면 함께 할 수 있는지, 자신의 본 모습을 솔직히 드러내 보여준 리더에 대한 지극히 당연하지만 너무도 새로운 매력. 불쌍하긴 하지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힘들었던 ‘장준혁’과, 도대체 속내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가면 뒤에서 썩어버린 내면을 드러내버릴 것 같은 ‘이주완 과장’에게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아닌, 낯설지만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쿨하게 드러내는 ‘강마에’에게서, 리더와 팀원으로서의 관계의 기본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마에의 리더십이 아주 훌륭하다고 격찬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배워온 것처럼 바람직하고 훌륭한 리더라면 팀원들을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챙길 수도 있어야 하고, 믿음직스러운 아버지처럼 비전을 제시하고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 갈 수 있어야겠지요. 해결되지 않은 상처로 끊임없이 팀원들과 갈등하면서는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마에에게서 희망을 찾는 것은 그가 그동안의 독재적 리더들에게서 느껴지는 소통의 절망과 이후 다변화되는 사회의 과도기에 등장한 그럴듯해 보이는 리더들, 말만 있고 실천이 없는 리더들에 대한 허망한 기대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진실되게 드러내 보이고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우리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 미리 깨닫게 해줌으로써 관계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최소한의 진실된 시도를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강마에, 리더십의 해방구가 되다.

꿈?
그게 어떻게 니 꿈이야 움직이질 않는데.
그건 별이지.
하늘에 떠 있는 가질 수도 없는
시도조차 못하는 쳐다만 봐야 하는 별.

누가 지금 황당무계 별나라 얘기하재?
니가 뭔가를 해야 될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부딪치고 애를 쓰고,
하다못해 계획이라도 세워봐야,
거기 니 냄새든 색깔이든 발라지는 거 아냐.

그래야 니 꿈이다 말할 수 있는 거지.
아무거나 갖다 붙이면 다 니 꿈이야?

그렇게 쉬운 거면 의사, 박사, 변호사, 판사 몽땅 다 갖다 니 꿈하지 왜!

꿈을 이루라는 소리가 아냐 꾸기라도 해보라는 거야.
사실 이런 얘기 다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상관 있겠어.
평생 괴로워할 건데.
난 이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구나
꿈도 없구나 꾸지도 못했구나,
삶에 잡아먹혔구나,
평생 살면서 니 머리나 주어 뜯어봐.
죽기 직전이나 돼서야 지휘?
단발마에 비명 정도 지르고 죽든지 말든지.

꿈꾸는 사람은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자신의 꿈을 위해서 뭔가 시도해 보는 사람은 꿈꾸는 사람만큼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리더십에 대한 관심은 결국 모두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싶은 관심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그만큼 의미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은 열망들은 많아졌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것이죠. 그래서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두리번두리번하다 보니, 성공 스토리, 리더십, 처세에 관한 이야기들에 흥미를 가지게 되죠. 하지만 그것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배워야 할 리더십은 바로 당신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옷을 찢고 상처 난 부위를 직면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순물은 제거하고, 아프더라도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꿰매야 하는 것이지요. 이 모든 치료의 시작은 상처, 자기 자신에 대한 직면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구요. 강마에의 말처럼 꿈꾸는 모든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무언가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이 도전하기 시작하는 순간 삶은 어긋났던, 왜곡되어 있던, 자신의 모든 것들을 차례차례 드러내고 하나하나 치유하기 시작합니다. 가면 쓴 자기 자신을 거울로 직면하게 되고, 아프지만 시원하게 자신의 가면과 이별하면 이내 가면 뒤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내면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건강한 자아로 충만한 자신을 만나게 되고, 이미 꿈에 한참이나 가까워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지요.

강마에는 우리에게 의미 있고 풍성한 선물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상처 난 내면일지라도 진실되게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어느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과, 더 이상 누군가가 보여준 리더십을 흉내 낼 필요 없이 자신만의 고유한 것으로 꿈을 향해 걸어갈 수 있다는 용기를 말이죠.

강마에가 열어준 해방구로 성큼성큼 걸어가 보세요. 똥덩어리들이라고 불리면서도 당신을 존경하며 따를 당신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할 수 있는 당신만의 리더십으로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진정성은 리더십의 시작이라는 것, 베토벤 바이러스의 누구도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던 것처럼, 진정성은 비로소 꿈을 향해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딛는 시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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