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승객명단
[MOVIE 100] Nov 22. 2023 l M.멀린

‘It’s all connected’
죽은 게 아니라 다른 세계에 들어온 거지. 그리고 돌아가서도 다른 세계의 기억을, 관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났을 때에는 지워진다. 기억이. 그러나 관념과 의식은 그대로다. 그래서 생은 반복된다.
5년이 지나버렸다. 새로 진입한 세계는 5년 뒤의 미래이거나, 5년 동안 죽었다 살아났거나. 어쨌든 생략된 시간을 감수하고 승객들은 계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계시라고 말하고 직관이라 쓰겠다. 드라마에서처럼 소리가 들리거나 머리가 아프지는 않지만, 직관어를 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놀랐다. 작가는 뭘 알고 있는지. 암튼 직관어 강의 교과서로 써도 되겠다 싶었다.
5년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이들은 승객들만이 아니다.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소화해 내야 하는,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승객들의 존재 자체가 계시다. 해결해야 할. 머리가 뽀개지는.
5년이 지났다. 많은 선택이 이루어져 버렸다. 어쩔 셈인가? 이제야 나타나서. 그 과정에서 진보적인, 참으로 진보적인 (이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맞다) 소통과 선택들이 이뤄진다. 물론 근간인 가족주의를 크게 벗어나진 못하지만, 오히려 이런 선택을 대중들에게 어필하려고 계시와 직관을 가져다 썼나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지만, 마음에 든다. 그들의 상호작용 방식이 오랜만에 인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은 그렇지 않다. 대중은 쉽게 겁에 질리고, 두려움을 전가할 마녀를 찾아야 한다. 5년 만에 나타나 기적과 이사를 행하는 ‘사탄의 아이들’ 스러운 승객들은 마녀사냥에 최적이다. 물론 이 세계는 이미 종말에 진입했고, 승객들은 최선을 다해 계시에 반응했지만, 종말을 막을 순 없었다. 심지어 예수 같은 희생으로도. 이 대목에서 (봐야 뭔소린지 알겠지만) 선과 악의 합일, 그로 인한 구원의 구도가 그려지지 않은 것은 좀 충격적이었다. 드라마는 세상의 모든 승객들에게 오지랖 떨지 말고 방주를 타라고, 탈출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늦은 건가? 아, 마법사는 어쩔 셈인가!
다행히 계시를 완성한 승객들은 원래 갔어야 할 세계로 차원 이동을 완수한다. 다른 세계에서의 5년의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일까? 새로 도달한 그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과정을 경험했으니 반복하면 나을까? 5년을 한 번 더 살게 된 셈이니, 축복일까? 저주일까? 암튼 모르겠으면 마법사를 찾아와라. 기가 막히게 계시를 해석해 줄 테니.
이 드라마를 추천해 준 이에게, 승객들에게 마법사가 없어 안타깝다 전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해야 한다. 해석자 없는 직관과 계시가 얼마나 어렵고 난해하며 위험한지. 이 드라마가 아주 잘 보여주었다. 승객들에게는 그게 선택이 아니니까. 물론 하필 828편을 탄 건 선택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추천해 준 이와 마법사는 드라마 시청 중에 모두 828편을 타야 했다. 심지어 연결 항공편이었는데, 같은 일정도 아니었는데, 둘 다 강제로 828편을 타게 되었다. (주인공들처럼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게 아니다) 게다가 지난해 장만한 마법사의 새로운 캐리어에는 자메이카 국기가 떡하니 붙어 있었다. 스티커를 여러 개 붙였는데 그거만 살아남은 거다. 승객들의 5년을 삼켜버린 이 드라마의 비행기는 자메이카발 828편이었다. 우리에게도 계시가! 자메이카는 가보지도 못했는데. (그와 마법사의 시간의 역사에도 딱 승객들의 시간만큼의 공백이 있었던 것 역시)
놀랍지만 익숙한 이런 일에 마법사는 시큰둥하고 신물이 나기까지 하다. 중요한 것은 나타나는 계시, 직관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관념과 선택의 태도이니까. 거기에 두려움이 잠입하면 마녀사냥이 시작되는 거다. 그리고 첫 번째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는 드라마에서 확인하시라.
회개가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드라마의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다. 구원은 끝까지 해석과 선택이다. 용감한 선택도 잘못된 해석으로 먼지가 되고, 현명한 해석은 잘못된 선택도 기회로 반전시킬 수 있다. (인생이야말로 해석 투쟁의 연속이 아닌가) 계시와 직관을 ‘manifest’(_ 나타나다, 드러내 보이다, 현실화하다, 승객명단이란 뜻도) 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건 비행기 운전보다 어렵다. 그러니 탁월한 해석자를 곁에 두고도 사용하지 않는 승객이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라. 그러나 드라마에는 안타깝게도 마법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너의 현실에는 있지만. 답답해도 ‘All good things’ 라니 뭐 어쨌든.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828편을 타고 어떤 세계로 진입한 걸까? 알 수 없지만 보던 이, 듣던 말, 걷던 세계는 여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뜨는걸. 익숙한 모습이어도 너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몇만 광년이나 공백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서로 이상할 뿐.
그래도 나는 드라마의 결말에서처럼 너에게,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있는 참이다. 도대체 이 5년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기억이나 하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아는 이는 마법사뿐이니. 모른 척 또 인사하는 거다.
안녕, (오랜만이야 또 만났네)
나는 마법사 멀린이라고 해.
* 드라마가 구성이 탄탄하고 떡밥 회수에 탁월하다는 평에 동감한다. 아침 드라마 같은 구석이 없지 않지만. 이렇게 깔끔한 마무리라니. 매번 예상치 못한 반전을 주는 재미도.
* 승객들 대신 마법사가 튀르키예까지 와서 공작을 찾아야 할 줄이야. 암튼 마법사는 임무 완수! 방주 탑승권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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