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신의 아이들이 온다
[MOVIE 100] Jan 17, 2022 l M.멀린

이 세계와 저 세계는 분리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인간의 인식한계 때문에 보지 못하는 세계이고 알지 못하는 세계이지 모두 함께 공존하고 있는 분명한 세계이다.
이 세계에서의 일이 저 세계의 일을 추동하고 저 세계의 일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건 당연하다. 우리는 매일 꿈을 꾸고 잠깐 멍을 때리는 순간에도 수많은 세계를 넘나들고 있으니까. 다만 너의 의식이 집중하려는 세계가 지금, 너의 세계일 뿐이다.
중세 일본에 마비키라는 관습이 있었다. 생활고로 7세 미만의 아이들을 부모가 목을 눌러 살해하는 관습이다. 생활고로 인한 영유아살해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나 유독 일본에서는 그것이 근대에까지 이어져 왔다고 한다. 심지어 그게 인구조절의 중요한 수단 중 하나이기도 했다니 이 카르마는 어떻게 다 감당할까.
그건 오히려 생과 사,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가 모호한 일본인들의 종교성에서 기인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본 토속신앙의 흐름에서, 존재는 반드시 물질적 생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7세 미만의 아이들을 신의 아이들로 부르고 그들을 지옥 같은 이생 대신 신에게 돌려보내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니, 관념에 따라 인간 생의 의미는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듯.
그러면 이 세계와 저 세계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영화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는 도구로 거울을 자주 등장시킨다. 거울에 비친 나는 진짜 나일까? 내가 보는 타인의 얼굴과 그 타인의 얼굴이 비치고 있는 거울은 진짜일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내 모습과 거울에 비친 모습이 같다고 증명해주는 타인의 말인데, 그 타인은 어느 세계에 존재하는 존재일까. 모든 것이 모호하고 확정적이지 않은데 영화에서 무당은 육체적 고통만이 자신을 확인 시켜 준다며 영혼의 손에 칼을 찔러 넣었다. 물론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고통 속으로 빠져들었다. 느끼지 못하는 건 육체의 고통. 그런 자신을 목격하고 느껴지는 건 마음의 고통. 육체의 실감, 그것이 삶의 전부이다.
3차원 세계의 삶 말이다. 육체를 초월한 다른 세계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그것 말이다. 그래서 마법사는 인간 생을 가장 효과적으로 누리는 일은 육체를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왔다. 그러니 넘어지고 자빠지고 부러져도 보렴. 그건 귀신이 되면, 영혼으로 돌아가면, 꿈속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 아니 느껴지지 않는 일이니.
그러려면 직면해야겠지.
직면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있다는 자각을 준다. 그러나 회피하는 일은 쉽고 그것은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자기 유리한 대로. 그리고 카르마를 양산하지. 그러나 직면하는 일은 카르마를 자신으로 돌리는 일이고 되갚는 일이다. 인간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를 몸으로 녹여내는 일. 그래서 신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모두 끌어안음으로 구원했던가. 그 정도 고통으로 되는 일이면 죄짓는 일이 두려운 일은 아니겠다. 어느 생에 한 번 몰아서 카르마를 해소하면 될 테니.
그러나 두려운 일은 잃는 일이다. 두려운 것은 잃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직면하기를 주저한다. 잃을까 두려워.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다. 잃을 육체가 없는 영혼이, 귀신이, 두려움이 사라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건, 잃을 목숨이 있는 살아있는 인간들에게만 그렇다. 그러니 그들이 협박하거나 겁을 주는 대상은 언제나 살아있는 인간. 아니 그들을 두려워하는 건 잃을 것이 있는 인간. 그러므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면 감사하라. 아직 너는 살아있다니 말이니.
무당은 남자에게 잃을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끊어질까 두려워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누가 귀신일까? 여전히 자신에게 잃을 것들이 있다고 믿으며 산 인간인 척을 하고 있는 귀신일까, 살아있으면서도 잃을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끊어질까 두려워 연결되지 않는 사람일까.
그러나 아이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에서도 살아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가지고 다른 생명체에게 죽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워 하는 건 잃을 것이 많은 어른들뿐. 아이들은 그저 오므라이스가 먹고 싶고 외로우면 귀신이라도 불러다 놀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아이들이다. 사람이 아닌 거다. 그러나 사람이 된다는 건 두려움을 깨닫게 되면서이다. 성장은 두려움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다.
생의 찬란함은 소유와 부재의 연속으로부터 일어난다. 가지고 잃고, 얻었다 빼앗기고, 자라나다 꺾이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연결되고 끊어지는 일에 상처가 나고 아물고 단단해지고. 상처는 아문다. 깊어지기만 하는 건 다시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그냥 핥고만 있기 때문이다. 직면하고 일어서고 책임지고 상실하고. 보상 없이 상실을 반복하고 있다면 그만큼 큰 그릇으로 자라나고 있는 거겠지. 뗏목이 아니라 함선을 부양할 만큼 많은 물을 담느라 그런 거겠지. 그게 삶이라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상실은 어른의 몫이다. 신의 아이들이 오거든 그들에게 상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을 채우려다 성장이 일어나고 단단해진 그것이 부러지는 경험을 통해 유연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생은 나아가는 일.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는 일. 그러나 멈추면 사라지는 일. 두려움에 갇히면 귀신이 된다는.
감독은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그 감독이다. 개인적으론 곡성에 만배쯤 음산하고 소름 끼쳤다. 게다가 판타스틱. 명불허전. 심지어 한류라고 한국용병무당들도 나온다. 그러나 승자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아이를 끌어안고 강을 건넌 그 둘. 이웃 나라 사람들이 카르마를 안고 이 세계로 걸어 나오길 언제나 기다린다.
위즈덤 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