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싸이코가 된 하녀가 갖고 싶은 그 집

[MOVIE100] Oct 25, 2021 l M.멀린

 

 

그녀들은 사랑을 얻고 싶은 걸까 집을 갖고 싶은 걸까? 그녀들은 하나같이 집을 욕망한다. 집을 욕망하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참으로 집착적이다. 어쩜 그리 오직 한 길일까? 집이 대체 무엇이관데.

<하녀>, <싸이코>, <아파트 열쇠를 빌려 드립니다> 공교롭게도 모두 1960년에 제작된 이 세 영화는 모두 집에 대해 그리고 있다. 이 세 영화를 이렇게 나열해 보는 건 이번 <20세기 영화제>가 전 세계에서 처음이 아닐까 싶다. 집에 관한 그녀들의 이야기 말이다.

앞의 두 영화의 그녀들은 집에 대한 욕망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이번 영화<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의 그녀는 성.공.적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그를 선택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자살을 하면서까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던 그녀는 사랑하는 상사가 집에서 쫓겨나자 대번에 마음을 돌려 아파트에 사는, 그것도 뉴욕 한복판 아파트에 사는 (렌트인지, 자가인지는 아직 중요치 않다. 적어도 스포츠 클럽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집 잃은 회사 상사보다는) 그에게로 달려간다. 이건 해피엔딩이다. 그녀에게. 그리고 그에게?

1960년의 세 거장 감독에게 비친 시대상은 ‘어쨌든, 집’ 그것이었나보다. 그건 뭐 더 심화되었으면 되었지 초월 되진 않았다. 집 없이 숟가락 두벌만으로 시작하는 신혼의 신화는 말 그대로 정말 신화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집 때문에 아예 결혼을 상상도 하지 못하는 세대조차 나이를 너무 먹어버렸다. 그러니 이것은 장장 60년에 걸친 현대사회의 기나긴 몰락의 과정 그 자체다.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야 자아실현의 단계로 나아갈 텐데, 어찌 의+식의 문제를 해결한 현대사회가 정작 주의 문제는 해결을 하지 못하는 걸까? 오히려 의+식이 남루했던 그 시절에는 주는 그래도 마당 하나를 가질 만큼은 되었는데, 싸리문이어도 현관이 아닌 대문을 가질수도, 심지어 싸리로 만든 울타리도 가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고작 현관문 하나에, 청춘들이 겨우 몸을 누이는 고시원을 보자면 멀수록 좋다는 화장실을 이고 자야 하는 형국이니 이건 차라리 배를 곯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거주의 자유를 상실한 인간은 타인의 아파트를 탐하고 그것은 권력이 되어 상사들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 심지어 회사를 관두어도 그들의 애인을 줄 서게 할 수도 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세상이람.

현대사회의 집을 가지기 위한 인간의 욕망은 달려도 달려도 만족이 되지 않아 달리다 죽어버린 톨스토이 소설의 주인공 같다. 네가 달린 만큼 너의 땅이 될 것이다. 네가 집착한 만큼 너의 집이 될 것이다. 100채가 우습지도 않은 집 부자들이 빚을 그만큼이나 안고 집을 마구 독식해가도 망하지 않는 세상에서 오히려 그 짐을 대신지는 건 집 없는 세입자들뿐이고, 인생의 여정이란 것이 집 평수를 늘려가거나 월세에서 전세, 전세에서 자가, 원룸에서 아파트로 옮겨가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린 세상은 참으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초가집이어도 누구나 내 집을 가지고 살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지.

사랑이 집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할까? 자살로도 증명할 수 없던 사랑을 아파트 열쇠로 당당하게 증명하는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그곳은 너의 집인가?

한 사람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공간이 적어도 25평이라는 데 예전에는 그렇게 살았다. 다 모여 살더라도 그만큼 넓은 공간이 모두에게 주어졌고 여기저기 흩어져서 각자 무엇을 하더라도 부족함이 없었고 그런대로 사생활도 지켜졌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가 둘이 셋이 그 공간을 차지하지도 못한 채 다닥다닥 조막만 한 거실과 방에서 붙어 앉아 쇼파 이쪽과 저쪽만큼의 거리만을 유지한 채 온갖 체취를 풍기며 스트레스를 양산하니 피할 곳은 카페뿐이다. 어디로 가겠어. 작디작은 스타벅스 탁자와 의자 한 칸이 내가 점유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고, 탁 틔인 통유리창 너머 사람들이 나의 가족인 것이다. 머물지 않고 지나가는 그들의 움직임이 말이다.

모여 살면 오히려 쾌적하고 넒은 공간을 가질 수 있다. 각자가 흩어져 살면 냉장고도 그만큼, TV도 그만큼, 초고속 인터넷도 그만큼, 자동차도 그만큼, 전자렌지도 그만큼 필요한 것이다. 그걸 팔아먹으려고 산업사회가 우리를 갈갈이 찢어놓는 바람에 우리는 그 많은 것들, 함께 살던 시절엔 하나면 되었던 그것들을 각각 사서 짊어지고 그때보다 한없이 작아진 공간에서 이고지고 서 있다. 엉덩이 붙일 공간도 없는, 창고인지 집인지 모를 공간에서 말이다.

그래서 싸이코가 되어버렸는지 모른다. 미쳐버렸는지 모른다. 하자고 들면 하녀가 되어도, 엘리베이터걸이어도 집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달려도 달려도 가질 수 없는 그것을 욕망하며.

그녀들에게 차라리 집을 선사하고 싶다.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해도 어디선가 나타나 나를 구원해 줄 그, 품위 있는 의사를 이웃으로 둔 그, 밸 꼴리면 언제든 나를 위해 직장을 때려치울 수도 있는 그, 아픈 나를 위해 파스타와 와인이 차려진 촛불이 켜진 식탁을 준비해줄 수 있는 그,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 한복판의 아파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그. 그라면 말이다. 내가 그라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그라면 나는 언제든 그녀들을 식사에 초대해 놓구선 우리는 모두 스스로를 덫에 가둔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해대며 그녀를 욕실로 이끌지도 모르고,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매달리는 그녀들 앞에서 영혼만큼은 너에게 줄 수 없다며 재봉틀을 돌리는 본처에게 기어갈지도 모른다. 그런 그라도 좋다면 집 따위야 얼마든지.

사람들의 뇌를 모두 집이 점령해버린 시대에 사랑을 말하는 건, 순수한 사랑을 말하는 건 참으로 순진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집쯤 너를 위해 언제든 떠날 수 있어, 얼마든 버릴 수 있어. 그게 내 사랑이야 말한다면 ‘이런 미친놈아 가서 당장 집 찾아와’ 하고 말해 줄 그녀들이, 싸이코가 된 그녀들이, 당신의 모텔이 지겹다고 말할 때 유유히 아파트 열쇠를 강물에 던져버릴 용기를 잃지 말기를. 그게 집에 잡아먹히지 않을 그대의 유일한 무기가 되어줄 테니.

 

 

위즈덤 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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