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리더십의 한계, ‘고수 리더십’

2008.06.29

 

‘디렉터형’ 리더

성장 가능성에 집중하는 ‘트레이너형’ 리더와는 달리 ‘디렉터형’ 리더는 프로 세계의 리더입니다. 이들은 늘 최상의 컨디션을 보유한 선수에게 기회를 주고, 최적의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작전을 수립합니다. 이들에게 경기는 매번 한판의 도박이며 천당과 지옥을 왕복하는 아슬한 줄 타기입니다. 삶은 치열한 전쟁터이며 한번 밀리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외나무 타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머리가 하얗게 새고, 잠이 부족해 충혈된 눈과, 늦은 밤 함께 한 야식 때문에 나온 불룩한 배가 특징입니다.

디렉터형 리더에도 두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고수형’ 리더와 ‘믹서형’ 리더.

 

‘고수형’ 리더

‘고수형’ 리더는 말 그대로 고단수입니다. 한 번에 두수, 세수가 아니라 수십 수쯤 내다봅니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고, 그중 확률이 높은 몇 수에 대해서는 100% 확률에 해답을 제시합니다. 이변이 없는 한 이들에게는 백전백승이 일상입니다. 사람들의 수라는 게 거기서 거기이고, 한수만 두어봐도 부처님 손바닥 마냥 결과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예언은 언제나 적중하고 빗나가는 경우가 없습니다. 수많은 실전 경험과 탁월한 상황인식은 말 그대로 ‘실패란 없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 실패하는지도 너무 잘 알아서 실패하는 게임은 아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상대와 자신의 선수들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기장의 그라운드 상황과 관중의 응원 방식, 언론의 태도 모든 것이 계산 되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사전 대처와 전략 수립에 만반을 기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전권입니다. 고수의 시각이라는 것이 범인들과는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기에, 이들의 전략은 일반인들에게는 낯설고 불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승리의 조건은 간섭이 없는 전권인 것입니다. 열악한 조건일수록, 단 한 수의 실투로 모든 승리를 날려 버릴 수 있기에, 이들에게는 단 한 수도 간섭받지 않고 전략대로 진행할 수 있는 절대적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대표적인 예로 히딩크 감독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한일 월드컵에 앞서 한국 대표팀과 주변 상황, 상대국에 대한 모든 데이터를 철저히 수집하고 분석했습니다. 게다가 백전노장의 경험치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앉아서 백리 밖을 내다보는 신기를 보여주었지요. 16강을 통과하기도 전에 8강 상대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승부차기까지 미리 예상하여 키커와 공을 차는 방향까지 선수들에게 지시할 정도였으니, 과히 그의 예견은 점쟁이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의 쾌감은 자신의 예상대로 수가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경기는 예언의 성취이고 천재성을 증명하는 공개방송입니다. 말 그대로 이들은 ‘천재’입니다.

하지만 선수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좋은 리더가 아닙니다. 경기에 뛰는 선수들은 자신이 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만 빌려주고 감독이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와서 경기를 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죠. 스파르타식 리더처럼 리더의 재단에 맞춰 팔다리를 자를 필요는 없지만,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고 나면 무엇엔가 홀린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한 허탈감에 빠지고 심지어는 영혼을 강간당한(?) 듯한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어떤 선수들은 마치 자신들의 실력이 일취월장 한 듯 기고만장하기도 하지만, 이내 리더가 떠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의 제 모습으로 돌아오고 말죠.

결과를 위한 단기 처방, 일시적 처방에는 ‘고수형’ 리더만큼 좋은 리더가 없습니다. 이들은 능력은 일당백을 넘어 일당천, 일당만을 하기 때문에 투자한 것 이상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단체경기일지라도 상대는 감독 한 사람과 전투를 벌이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지요. 그래서 이들의 승리 이후에는 선수보다는 천재 감독의 명성이 더 회자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창조한 한국 축구는 히딩크가 빠져나가고 전력이 썰물처럼 떨어졌습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본래의 실력으로 돌아왔다는 것이겠습니다만.. 물론 박지성처럼 대선수로 자라난 경우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본인의 피나는 노력과 연이은 좋은 기회 때문이지, 월드컵 당시 박지성이 이미 그만한 실력의 소유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일부 선수들은 과대평가되는 분위기에 도취하여 섣부른 선택을 하였다가, 이래저래 본전도 못 찾고 몇 년을 헤매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 였으니까요. 사실 2002년의 4강 성적은 한국 대표팀의 성적이 아니라 히딩크 감독의 성적이었다는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천재일 것 같은 이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장기전에 약하고 그래서 수명이 짧다는 것입니다. 같은 팀으로 한번은 대박을 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을 떡 주무르듯 하기에, 장기전에 돌입 할수록 오히려 선수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감독과 선수간의 실력의 갭이 클 경우에는 선수들이 미처 따라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물론 이들은 이런 경우를 예상하여 우승 이후 감독직 연장을 고사할 만큼 영리하지만요. 아무리 천재라도 감독의 실력만으로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펴라는 원칙은 이들 ‘고수형’ 리더에게 있어선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유로2008 대회에서 히딩크의 러시아 대표팀은 아니나 다를까 돌풍을 일으키며 4강까지 올랐습니다. 유럽 축구의 변방이었던 러시아의 유럽 선수권 4강은 천재 감독의 너무도 당연한 실적입니다. 그런데 역시나 거기까지였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대표팀의 4강,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 대표팀의 4강, 그리고 2008년, 유로2008 러시아 대표팀의 4강. 사람들은 히딩크 감독의 ‘4강 징크스’라 말하지만 그것은 징크스가 아닌 한계입니다.

경기 이후, 기자회견에서 히딩크는 “소위 전통적 강팀은 토너먼트에서 계속 올라갈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경기를 치르면서도 그들의 퀄리티를 유지한다. 2002년 당시에 한국은 그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던 팀이며 러시아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그는 “후반 15분까지는 (스페인과)같은 수준의 경기를 펼쳤지만, 그 뒤에는 격차가 벌어졌다. 그것이 전통적 강팀과 그렇지 않은 팀의 차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강팀은 자신들의 퀄리티를 스스로 조절합니다. 마치 자동 온도조절기처럼 말이죠. 에너지를 분배할 줄 알고 자신의 몸 상태를 지속적으로 최적화 시킵니다. 이것이 진정한 실력의 차이이고 감독이 커버해 줄 수 없는 한계인 것입니다.

이들의 약점은 최고 기량의 스타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천재 감독에 천재 선수. 이상적인 최적의 조합일 것 같지만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갑니다. 천재 선수들에게 ‘고수형’ 리더는 마치 시어머니 같고, 자신의 기능만 교묘히 착취하는 악덕업자 같기 때문 입니다. 수십 수까지 미리 내다보고 예측대로 플레이를 지시하는 천재 감독이, 순발력과 자신만의 창의적인 플레이를 펼치고픈 천재 선수에게 만족스러울 리 없습니다. 또한 감독 자신의 손과 발이 되어 전략대로 철저하게 움직여 줘야 할 선수가, 예상치 못한 튀는 행동으로 자신의 계획을 위기에 빠트린다면 좋아할 감독이 있을 리 없습니다. 2002년 당시 한국 최고의 골키퍼로 인정받던 김병지 선수가 튀는 행동 한번에, 월드컵에서 단 한 차례의 경기도 뛸 수 없었던 사실은 이러한 ‘고수형’ 감독의 스타일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실지로 히딩크 감독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모여 있다는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 시절, 선수들과의 불화에 시달리고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경질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첼시의 감독직을 고사해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고수형 리더 히딩크에겐 너무도 당연한 선택인 것입니다.

자신이 아직 기본기가 안되었다고 느낀다면 이런 유형의 리더는 피해야 합니다. 이들과 함께한 성과는 마약과 같아서, 약발이 떨어진 다음에는 더욱더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잘못된 과대평가는, 자신을 착실히 성장시켜 나가야 할 선수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천재 선수라면 충고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불만족이 장마철 한강 수위만큼 높아졌을 테니까요. 다만 조금의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다면, 일단 성질 죽이고 차분히 이 천재형 리더의 넓은 시야와 동물적 감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지혜의 시간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 해도 통제 없이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고 싶은 욕심이 치밀어 오르는 선수들에게는 백약이 불효합니다.

어서 떠나십시오. 장기적인 관점에서 당신은 아직 당신의 진짜 리더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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