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탈출하긴 쉬워도

[MOVIE 100] Jan 24. 2023 l M.멀린

간신히 코로나를 피한 세상에 다시 바이러스가 덮쳤다. 이번에는 ‘광인병’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미쳐서 죽지도 않고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피를 갈망한다. 뻔한 설정에 뻔한 전개지만 뭔가 달랐다.

그러니까, 좀비 재난물 대부분이 주인공들의 좀비소굴 탈출기라면 이 드라마는 터전을 지켜내기 위한 수성전이라고 할까? 아파트 단지에 갇힌 주인공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 좀비들 사이에서 가치를 지켜나가는지. 자신들의 터전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내는지. 목숨보다 가치다. 심지어 감염되어 좀비가 되는 한이 있어도 지켜내야 할 ‘가치’. 그건 저마다 다르겠지만, 괴물이 되어버린 그 인간들도 돈이든 명성이든 지켜야 할 저마다의 ‘가치’가 있겠지만, 문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상호 간 합의해 온 규칙, 규범, 전통, 의식 같은 것들을 어떻게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내고 수호해 가는 가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이 드라마가 말한다. 나만 그렇게 봤나?

“코로나 이전 세상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생활 속 방역 활동이 우리의 일상이 될 것이다.”

‘기본’이라고 믿었고, ‘일상’으로 여겨졌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일상이 무너지고 기존의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할 때, 대부분의 소시민들은 기존의 삶이 대단히 만족스럽진 않더라도 큰 변화 없이 삶이 유지되기를 바랄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 행복을 추구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뿐이다.

해피니스(Happiness)는 코로나가 끝난 근미래를 배경으로, 기존에 의미를 두었던 가치들이 생존을 위협받을 때도 변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제작진도 그런 걸 말하고 싶었단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을 그리는 건 이제 너무 흔해서 그거야말로 클리셰. 전원일기 같은 협동과 순수한 연대의 정신이 너무 귀해서 차라리 참신해져 버린 마당에 그걸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이게 뭔가 싶은가 보다. 이젠 윤리 교과서에서도 배우지 않는 건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것은 그렇게 해야 천적에 맞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 능력을 강화하는 대신 뇌를 발달시킨 인류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위기에 대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도구를 발달시켜 천적을 모두 무찔렀다. 피라미드 먹이사슬의 최종 지배자가 된 인간에게(물론 모기가 있긴 하다) 공동체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무기가 되어버린 걸까? 이제 천적은 내부에만 있으니 연대와 협동을 버리고 각자도생을 시작한 걸까? 어쩌면 자연스러운 진화의 과정일지도.

그래서 인류는 외계인을 상상한다. 천적이 없으니 가상의 천적을 만들어 대통령이 전투기를 타고 외계인을 무찌르고, 온 국민이, 인류가 합심하여 천적을 몰아낸다. 그게 마지막 호모 사피엔스의 전쟁이다. 그 ‘인디펜던스 데이’를 선언한 게 1996년이니, 이제는 막아내야 할 외계인도 소재 고갈이다. 내부의 적을 만드는 수밖에.

좀비 되기는 쉽다. 제약사들이 만들어 낸 ‘성인용 ADHD’ 치료제를 한 알만 먹어도 광인병에 걸려 좀비가 된다. 그것참 그렇게 쉬운 걸 왜 여태 갈구고 따돌리고 왕따시키느라 에너지를 썼는지. 쓸모없어진 동료는 좀비로 만들어 무찌르면 그만이다. 그래서 전기도 수도도 끊긴 아파트를 통째로 접수한들 ‘행복’ 할까? 입주민들이 모두 사라진 아파트의 입주자대표가 되는 게 명예로울까?

드라마는 후반으로 갈수록 좀비가 괴물인지 탐욕에 쩌든 인간이 괴물인지 분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무찔러야 할 대상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참 잘 만들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좀비도, 좀비보다 더 괴물이 되어버린 이웃집 사람들도.

그건 좀 감동적이면서 마음이 묵직해지게 한다. 탈출이 아닌 방어. 괴멸전이 아닌 수성전. 대상은 우리 모두다. 미우나 고우나, 아름답거나 역겹거나,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거나, 좀비도, 괴물도, 마음씨 착한 이웃 주민도, 모두 ‘우리’이고 지켜내야 할 ‘가치’이다. 가르기 시작하는 순간 연대는 깨어져 나가는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가르고 누구는 저렇게 가를 테니까.

각자도생,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누군가 들은 저렇게 수성전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방주일 테고, 이게 인류 진화의 극한이라면 물극필반을 따라 뒤집어지겠지. 천일동안 비가 내리고 빙하가 다 녹고 화산이 폭발하겠지. 그래도 그 누군가 들은 방주를 지켜낼 거야. 모두가 올라탈 수 있었던 그 방주.

그리고 새로 시작하자.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에서.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겠니?

 

P.S.

1. 박형식, 한효주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나? 배우들 연기가 다 볼만하다. 

2. 중간중간 텐션이 떨어지고 뻔한 설정들이 있지만 편집이 나름 신선하다. 미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3. 디스토피아 같은 유토피아다. 어쨌든 모두 살아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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