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희생을 낳고 행복은 행복을 낳고

2010.01.30 

 

희생이 아니라 행복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어떠한 일에도 결정을 할 때에는
네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
함께하는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해.

아빠가 행복하면 엄마가 행복하고
엄마가 행복하면 아이가 행복한 거야.
아빠가 희생하면 엄마가 희생하고
엄마가 희생하면 아이가 희생을 당하는 것이지.

우리는 이를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빠와 엄마는 아이를 위해 희생하고
이것이 아이의 행복을 보장해준다 생각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야.
어떤 사람도 본인의 행복하지 않은 현실을
오래도록 견뎌낼 수는 없는 거란다.

많은 아빠와 엄마들은 마취제처럼,
그저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희생이 보상받고 있다고 여기지만,
진실을 들춰보면 실상은 스스로에게
거짓을 강요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단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마치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
우리 삶에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한 찰나와 장면 속에서만
희생이 보람 있다고 여겨지는 거야.
현실은 팍팍하고 어렵고 고통스러운데,
어제의 아이의 웃음은
그러한 현실을 감내하도록 강요하고,
박차고 나와 용기 있게 자신을 대면할 수 없게 만드는
핑곗거리로 만 그려지지.

아이가 정말 행복할까?
자신 때문에 부모가 희생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말이야.
대부분 이러한 부모들일수록 부인하면서도, 
마음속 어디선가 아이에 대한 보상을 꿈꾸게 되는 거야.
노후보장이나 효도 따위의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너라도 잘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는 마음.
그래서 아이는 삶을 살아가며 당연히 겪게 되는 시행착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담백배 인체로
잘해서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리지.

이것은 거룩하고 숭고해 보일지 몰라도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일종의 협박인 거야.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네가 이만큼은 살아주어야 하지 않겠니?’
부모의 희생이 크면 클수록
아이의 부채의식도 그만큼 커지는 것이지.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일수록,
자신의 부모와 같은 삶을 반복하게 될 확률이 크다는 거야.
보고 자란 부모의 역할이란 것이
자신들의 행복이 아닌 희생뿐이었으니,
감당하기 버겁다 생각하는 아이들은 결혼을 주저할 테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아이들은
또 자신의 아이들에게 희생할 테지.
일종의 희생의 대물림이랄까?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고 대신 희생한 부모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가게 되는 거야.

너는 반문하고 싶겠지.
부모의 희생으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는 기쁨을
간과하는 것이 아니냐고?
나는 아이들이 부모의 행복 가운데 자라나길 바라는 거야.
부모의 찌든 희생의 결과로
기본적 생존권만 보장받은 채 자라나는 게 아니라,
비록 위태위태한 생존 여건 속에서도
충만한 부모의 행복감 속에 자라나는 게,
더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 아닌가 묻고 싶은 거야.
또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아이들 스스로,
자신이 처한 삶의 진실을 바로 대면하고
선택,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장기간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힌 채,
희생만 반복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야.
스스로 만족할 수 없는 생활을 반복하며
기쁜 얼굴로 아이와 상호작용하고
충만한 애정을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거든.
내가 행복해야, 충만해야 차고 넘쳐야
그게 아이에게까지 흘러갈 수 있는 거란다.
쥐어짜 내 봐야 아이들은
희생의 쓴 물로 얼룩진 짜증만 맛볼 뿐이야.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겠니?
시작할 때 말이다,
너의 행복의 조건을 스스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해.
그래서 희생을 전제로 하는 일이라면 깊이 심사숙고해야 해.
가능하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지향점을 찾아야 해.
모두에게 희생이 강요되지 않는 여건에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시작한 일이라면 가능한 희생을 최소화하고,
너 스스로가 만족스럽고 행복한 가운데
지속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을 창조해 낼 수 있어야 하는 거야.
필요하다면 당혹스럽고 부담스럽더라도
현재의 여건을 과감히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 달려가는 부모들의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 더 건강하게 자라게 되더구나.
그들은 늘 도전하고 성취하고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부모에게서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지혜를 배울 뿐 아니라,
그 도전 끝에 오는 성취를
함께 즐기는 기회를 제공받기 때문이야.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주어진 자기 집에서 성장한 아이가,
셋방을 전전하다 비로소 작은 집이라도
자신들의 집을 얻게 되는 기쁨을 누려 볼 수 있겠니?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부모 덕에
편안하고 안락한 유년시절을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그 아이에게는 부모에 대한 부채의식 없이,
저 또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거란다.

누군가를 먹이려면 너부터 살아야 해.
네가 죽으면 네가 먹여 살려야 하는 그들도 죽는 거야.
임신한 어미 배가 고파서야 어찌 뱃속 아이가 배부를 수 있겠니.
인간 생존의 시작은 그렇게
나를 품은 더 큰 존재의 만족과 행복에서부터 시작해 왔어.
부모가 기운을 얻고 행복할 수 있어야
그 혜택이 아이에게 돌아가지.
그러므로 가장 무식한 짓은
아이들 먹이려다 병 걸려 죽거나 거동이 불편해져.
졸지에 아이들을 소년, 소녀 가장으로 내모는 짓이지.
행복도! 행복도 마찬가지야.
아이들 행복하게 해준다고 자신의 행복 따위는 안중에 없다가,
스스로를 스트레스로 채우고 채우는 거야.
그러다 과로사 하거나 우울증에 걸려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부모와의 기본적 교류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거야.
생존에 버거운 부모들일수록 너 해줄 거 다 해줬는데
왜 공부 안 하냐고, 부모 말 안 듣냐고,
자신이 희생한 것만큼
아이에게 짜증과 잔소리를 내기 마련이지.
그렇게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위험하게 줄타기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가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해.
그 결과가 자연스럽게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테니 말이다.
그래서 언제나 결정의 기준은 희생이 아닌 행복이어야 한다.
불가피하다면 그 희생이 너의 행복을 위한 대가 지불이어야 해.
적어도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르지만,

그 결과가 너에게 명확한 행복의 실체로
얻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 것이 아니라면,
희생을 위한 희생은 멈추어라.
끝이 보이지 않는 희생이라면,
핑계대지 말고 지금 멈추어라.
희생은 희생을 낳고,
행복은 행복을 낳는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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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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