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풍문으로나 들었소

* SBS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에 관한 리뷰입니다. 드라마를 보시지 않은 분은 이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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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찼던 봄이의 체제 전복기가 어설픈 마무리로 끝나 버렸습니다. 관심 있게 보던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 말입니다. 갈수록 김이 빠지더니 결국은 뻔해져 버렸습니다. 노예들은 함께 잘 살자며 뛰쳐나와 공동체를 만들고, 외로운 늑대는 궁궐에 홀로 남아 쓸쓸히 죽어갈 거라는 해피엔딩 말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꿀송이는 벌이 무서우니, 쳐다도 보지 말고, 손에 묻으면 끈적거리고, 자칫 꿀독에 빠지기라도 하면 헤어 나올 수 없으니 근처에는 가지도 말아야 한다, 뭐 그런 건 가요? 솔잎은 어디 집어먹기 쉽답니까? 그렇게 쉬어 보여, 십 년, 이십 년 씩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린애들 쫓아 나왔답니까?
집사 부부는 대갓집에서 요리 좀 하셨으니 도시락 가게 하면 대박 나시겠습니다. 한 식구 입맛만 맞추면 되는걸, 싸구려 입맛의 세상 사람들 입맛에 맞추려니 마뜩잖고, 스트레스 쌓인 손님들 시중들다, 이러느니 한 사람 비위 맞추고 말지 소리 절로 나옵니다. 대갓집 집사로서의 삶이 몰락하는 자영업자 대열에 들어서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임을 곧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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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서는 마나님 비서 생활 15년에 몸종 노릇 그만두고, 같은 사람 돌보는 일이니, 보모 하면 잘할 것 같습디까? 애 돌보다 학을 떼고 보모는커녕, 애 낳기 싫어, 결혼도 포기하고 말 겁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괜한 세월이었습니까? 그것도 나름 전문직인데, 때려치우고 나올 때에는 그만한 각오와 준비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학원 강사로 모은 돈, 미래인재에게 투자하는 일이 겉으로 멋있어 보일 테나, 자신이 하지 못한 일에 대한 대리 성취는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부모 돈 받으나, 선생 돈 받으나, 남의 돈 받아 공부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옳으니 그르니 구분 없이, 준 사람의 한계 이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어차피 매한가지입니다. 착한 것이 선한 것이라는 논리나, 강한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논리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당차게 체재 전복을 꿈꾸다, 아차 싶어 도망 나온 서봄, 게다가 따라 나온 인상이는 뭔가 아는 척하지만, 아는 것만으로 사람이 바뀐다면 세상이 이 모양일 리 없습니다. 젊은 날 몸 고생하고, 힘 좀 드는 건 누구나 한다 쳐도, 생존에는 날고 기는 제 부모 손아귀를 과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함께 잘 살아보자고, 집도 같이 얻어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 철부지 어른들의 사회주의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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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살자는 뭘 모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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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잘 살자는 말만큼 어려운 말이 없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둘이 맞추고 사는 일도 어려운데, 다 같이.. 함께.. 함께 사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집사 남편은 공동생활 뒤치다꺼리가 자꾸 자기에게 돌아와, 내가 여전히 집사냐고 화가 나고, 식모 부인은 분리수거도 제대로 안 하고, 밥 먹고 설거지도 귀찮아하는 사람들에게 버럭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혼자 자유롭게 살다 같이 어울려 사는 일이, 뒤로 딴짓할 거리가 많은 이 비서에게는 족쇄 같을 테고,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순하고 착하기만 한 인상이는 자꾸 부족한 게 많아지는 삶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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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모든 일의 승자는 체제 전복을 꿈꾸며 당차게 적진으로 들어섰다, 아차! 싶은 생각이 들자, 모든 노예들을 데리고 엑소더스 한 ‘서봄’ 혼자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나약함도 덮어버리고, 도리어 정의의 화신이 되었으니, 여기까지의 서봄은, 노예들의 영웅인 듯합니다. 마침 포기하려던 공부도 독선생의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 계속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이도 지키고, 남편도 뺏어오고, 노예들까지 해방시켰으니 할렐루야겠습니다. 게다가 사시 합격까지 해서, 인권 변호사라도 된다면 해피엔딩이겠으나.. 어디 세상일이 그렇게 맘먹은 대로만 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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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버린 사람들, 종에서 주인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대궐 밖의 인생이 이토록 고통스러운 줄은 궐 안의 이들에게는 진정 ‘풍문으로 들었소’ 일 뿐입니다. 풍문이 아닌 현실은, 집사 부부에게는 떠나온 애굽의 풍족한 냉장고와 넘쳐나던 명절 선물들을 떠올리게 할 테고, 보모가 되겠다던 이 비서의 앞날은, 엄마들의 드센 요구에 차라리 한 명한테 굽신대고 말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겁니다. 시험 잘 보는 법을 줄줄줄 꿰고, 애들이나 가르치던 독선생이 사무장이라니.. 머리로만 익힌 지식이 현장에서 얼마나 쓸모없는지, 바로 깨달을 테고, 돈 없고 빽 없는 로펌 찾아온 의뢰인들의 막무가내에, 차라리 선생질이 속 편하지, 후회가 막심할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영이 말입니다. 봄이와 인상의 아들이며, 법무법인 ‘한송’의 손주이자 상.속.권.자.인 진영이 말입니다. 도대체 앞으로, 없는 집안 자식들의 삶이 얼마나 더 팍팍해질지를 알고도 ‘봄이들’은 그런 선택을 한 겁니까? 청년 실업의 엄청난 장벽이 더더욱 견고해질, 진영이의 미래는 누가 책임진답니까? 그리고 더욱더 극렬해질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 앞에서, 진영이는 조부모의 손을 계속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상속자로 등극할 수 있는 진영이의 운명을 ‘봄이들’은 계속 가로막을 수 있답니까? 그럴 자격이 있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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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자들의 연대는 오래가지 못 합니다. 자신의 목표가 아닌, 현실의 반동으로 뭉친 궐기는 반드시 분열을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은 숨긴 채,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봄이가 당차게 대궐로 쳐들어가, 밀려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가는 과정에, 적지 않은 흥분감과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슬이 퍼런 시어머니와도 맞서고, 애완견처럼 서열을 가리려 드는 비서를 꾹 눌러 주는 모습에 결기가 보이고 결단이 보였습니다. 익숙지 않은 방식으로, 편하지 않은 현실을, 진지하게 통제해 가는 모습에 혁명가의 자질이 느껴졌습니다. 이대로 잘 자라주어, 마침내 그들만큼 높아져서, 절대반지를 제 손으로 파괴해 주기를 기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동으로서가 아니라,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질서를 제시함으로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의 감탄과 인정 속에서, 자기를 확립해 가기를 기대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잘나가다 왜 그 모양입니까? 인상이가 아버지로부터, 이혼을 전제로 한 결정적 deal을 받자 바로 무너진 서봄.. 결국 봄이의 자신감은 인상이의 지지에 있었지, 자신의 내부에서 나온 힘이아니었던 겁니다. 그건, 그냥 부자 남편, 상속자 남편의 힘에 편승하고 있었을 뿐, 자신의 의지도, 자신의 목표도 아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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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는 솔직히 인정했어야 합니다. 시부모를 괴물이라고, 자기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보더라고 변명을 지껄이지 말고, 내 힘으로, 내 의지로, 맞서보겠노라고, 기왕에 들어선 호랑이 굴, 끝까지 버텨보겠노라고 다짐을 불태웠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도망가겠거든, 괜한 남편, 괴물의 자식 만들지 말고, 선악을 넘어선 진정한 신뢰를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애 데리고 도망쳐서 날개 옷 입고 날아가 버린 선녀 뒤쫓는 나무꾼 남편 만들지 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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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이는 진영논리를 배신하고 부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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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희망은 윤변입니다. 처음부터 목표를 정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 타깃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윤변 같은 존재들이 숨겨진 희망입니다. 모두 함께 잘 살아보자며, 혹세무민하며 무더기로 모아 놓구선, 계파다 뭐다 갈갈이 나누고 공격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놈의 진영논리는 진영이 선이지, 사람이 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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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는 진영이를 위한다며 진영논리(?)를 펴서, 인상이를 빼앗아왔지만, 성장한 진영이는 제 발로 할아버지를 찾아갈지도 모릅니다. 그놈의 진영논리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므로 진영이 맘대로 일 테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수도 없이, 죽 쒀서 개 주는 광경을 목격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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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럼에도, 인간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욕망의 정직한 방향에서 준비한 수를 놓고, 목표한 수를 기다리며, 한 발 한 발 접근해 가는 윤변 같은 혁명가들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겉 멋들지 않고, 함부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어설픈 호응에 우쭐하지 않는, 그런 혁명가들에 의해 역사는 진보해 왔습니다. 말만 많은 ‘봄이들’은, 어쭙잖은 변명과 감상적인 연대의식만 내세웠지, 현실 앞에선 늘 속수무책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윤변 같은 진짜들이, 어디선가 발현되기를 기다리며, 날을 날카롭게 세워가고 있습니다. 세상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시킬 혁명가들이, 온갖 음모가 판을 차는 세상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바일 혁명을 일으키고, 사람들 손에 자유를 쥐여주며, 대자본 따위에 영혼을 팔지 않고, 신자본을 스스로 창출해내며, 새로운 인류사를 개척해 가고 있습니다. 숨겨진 그들이 결과와 실체를 들고, 구차한 변명 없이, 사람들 앞에 어느 날 불현듯 등장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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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약한 ‘봄이들’은 상처나 빨고 있으라고 하십시오. 철없는 노예들은 하루빨리 정신 차리고, 늦기 전에 애굽으로 돌아가라고들 하십시오. 이들의 어설픈 함께 잘 살기가 성공했다는 얘기는 진정 ‘풍문으로나 들었을 뿐’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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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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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소년 Ridiculous Boy